죽음은 항상 살아있는 자를 순식간에 덮칩니다.

그러면서 죽음은 살아 있음의 의미를 뿌리에서부터 뒤집어 버리고 파괴해 버리려 합니다.

죽음이 삶을 비웃고 헛탕치게 만드려 하는 것이지요. 이런 죽음의 논리에 빠지게 되면 모든 사물과 사건이 무의미하게 다가옵니다.

이를 몸소 심하게 느끼면 삶의 밑바닥을 느낀 것이겠지요. 그러고 나면 그 어떤 이성적인 논리도 통용되지 않는 듯한 신열을 앓게 됩니다.

영화<블루>의 주인공 줄리가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줄리는 느닷업이 죽음의 논리에 공격당합니다.

그녀의 삶은 죽음 속으로 녹아버리고 맙니다.

도처에서 죽음의 냄새를 심하게 느끼고 삶을 구역질합니다.

줄리는 전혀 남부러울 것 없이 풍요로운 일상의 삶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는 우발성에 압도됩니다.

자동차 사고로 사랑하는 어린 딸 아이와 유럽 통합을 기념하는 대 교향곡을 작고할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인 남편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녀에게 찾아 온 것은 그저 존재 의미의 완전한 상실이었습니다.

그녀는 일체의 사물과 사건들로부터 스스로 차단되고 밥니다.

그녀에게 겨우 가능한 것은 공허할 뿐인 자신의 폐쇄된 시공간을 견디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상황은 짙은 고발트 빛 블루에의 집착으로 나타납니다.

이 검푸름의 ‘삶 속의 죽음’으로 울리는 색입니다.

키에슬로브스키는 이런 줄리의 모습에서 인간의 삶이란 죽음의 우발성에 근원적으로 얽매여 있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검푸름의 색조는 알 수 없는 곳에서 울려오는 장엄한 선율을 줄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시실 줄리는 남편의 이름 뒤에 숨겨져 있는 위대한 작곡가였습니다.

줄리는 지독히 차단된 자신의 시공간의 빗장을 우주적인 음악으로 깨뜨리고 다시 탄생합니다.

그제서야 자신을 짝사랑하는 남편의 친구와의 정사를 전신적인 느낌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줄리는 음악 예술을 통해, 삶을 뿌리에서 부터 헛탕치게 만드는 잔인한 죽음의 논리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녀는 죽음에 녹아버린 삶을 넘어서서 죽음을 녹여낸 삶을 획득했습니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삶은 무의미를 바탕으로 의미를 창출하며, 그렇다고 해서 신보다 불행한 것이 아니라 더욱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영화 <블루>는 줄리엣 비노쉬의 한치 빈틈없는 연기를 통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빚어낸 삶의 무의미와 의미를 노래한 한 편의 장엄한 서저십니다.

삶이 그저 욕망의 놀이에 익숙해 지면서 권태를 불러 올 때, 혹은 그 와중에 끝간 데 없는 고립감이 전신을 휘감는 듯 하고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고 위태롭기 짝이 없는 느낌이 심시랄 가득 채울 때, 위험하지만 우리는 영화<블루>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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