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케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에 의하면 인류 역사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의 경험은 영원한 것의 반복으로서 시간의 경험이다.

이것을 우리는 고대 종교적 축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바빌론은 매년 우주의 창조를 기념하는 축제를 거행했다.

이 축제는 신들의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괴물 티아맛트(Tiamat)에 의한 마르둑(Marduk)의 싸움과 승리, 이로 말미암은 우주의 창조를 중심 주제로 가지고 있었으며, 우주의 태초에 일어난 이 신화적이며 근원적 사건이 축제 속에서 현재화되고 반복되는 것으로 생각됐다.

이러한 축제에 있어서 일상의 시간은 태초에 있었던 영원한 것이 반복되는 것으로 경험된다.

태초의 영원하며 근원적인 사건, 신화적 사건이 축제를 통해 일상의 시간 속에서 현재화되며 반복된다.

이리하여 시간은 순환적 구조(zykilsche Struktur)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태초에 있었던 것, 근원적 시간이 언제나 다시금 순환적으로 반복되는 일종의 원운동(Kreislauf)이다.

원운동에 있어서 엄밀한 의미의‘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동일한 법칙 속에서 반복된다.

따라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개체성과 유일회성이 부인된다.

모든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과거의 것과 다른 구도(Konstellation) 속에서 일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는 여기서 폐기된다.

이러한 시간의 이해를 우리는 현상의 것을 영원한 이데아의 모상으로 보았던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시간을 하나의 원과 같은 것으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서의 시간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시간은 대상에 대한 감성적 지각이 가능케 되는 선험적 형식이다.

우리 인간이 어떤 대상을 경험하기 전에(aprori) 이미 주어져 있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감성적 자료를 얻게 되며, 이로써 인식의 과정이 시작된다.

대상들의 세계는 변천하지만, 시간은 변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비어있으며 대상에 대한 감성적 지각이 그 속에서 가능케 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러한 시간관에 의하면 시간 안에서 모든 사건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변하지만, 시간 자체는 일어나지 않으며 변하지도 않는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흐르지만, 시간 자체는 흐르지 않고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존속한다.

그것은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직관의 선험적 형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의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영원히 동일한 것, 곧 영원한 현재이다.

이러한 시간관에 있어서 미래와 과거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양자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또 어떠한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 동일한 시간의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매순간의 유일회성, 불가역성(거꾸로 되돌릴 수 없음)도 인정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사건들로부터 분리된,비어있는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특정한 사건들의 시간을 알 뿐이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전도서 3:1-8)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갖지 않는 사건도 없지만, 사건 없는 시간도 없다.

사건은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각 사건은 자신의 고유한 성격과 함께 단 한번 밖에 없는, 그러므로 뒤로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기독교는 시간을 영원히 동일한 것의 반복이고, 순환적 구조를 가진 하나의 원운동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미래를 향한 메시아적 역사로 파악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 구원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며, 약속된 미래를 향해 이 백성을 해방한다.

이 약속과 해방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래의 시간이 열려지며, 이제 시간은 약속된 미래의 성취를 향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로 말미암아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가지 양태로 구분되며, 이 세가지 양태에 있어서 미래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은 이 모든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있는’ ‘옛것’이라면, 미래의 시간은 이 모든 ‘부정적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자동적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과 복종을 요구한다.

따라서 시간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에 대한 인간의 결단과 복종의 장으로 파악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미래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든지 아니면 애굽의 고기가마에 집착해야 한다.

여기서 시간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것으로 경험된다.

그것은 결코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이 시대의 묵시사성적 파멸에 이를 수 있고 메시아의 약속된 구원에 이를 수도 있는 ‘개방적인 것’, ‘가능성의 것’이다.

이 개방성은 앞에서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우주적 대 재난과 파멸의 종말을 예언한다.

여기서 종말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소멸과 시간의 끝을 뜻한다.

그러나 성서는 묵시사상적 파멸의 가능성을 경고하는 동시에(베드로후서 3장) 죽음의 세력에 대한 예수그리스도의 승리와 만유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약속한다(고린도전서 15장). 이 약속에서 종말은 시간의 끝이 아니라 시간의 목적, 시간의 성취 곧 텔로스(telos)로 파악된다.

시간의 종말, 그것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이 세계의 대 파멸과 시간의 끝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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