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간 기간 막바지, 대전고등법원 이인석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존댓말로 작성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판결문에 익숙지 않다면 ‘존댓말로 판결문 쓴 게 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통상 판결문에는 ‘~하라’, ‘~한다’ 식의 어미가 쓰인다.

존댓말 판결문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7년 전, 긴급조치 제9호와 관련한 재심 청구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사법부는 과거 잘못에 대해 존댓말로 사과의 뜻을 전했다. 전체 판결문 중 사과의 뜻이 담긴 문장 딱 하나가 그랬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1948년 7월17일 헌법 제정 이래로 모든 판결문이 반말체로 작성돼 왔다. 순수한 의도에서 판결문이 전부 존댓말로 쓰인 건 약 70년 동안 이번이 처음이다.

반말 판결문은 오랜 ‘전통’인 셈이다.

판결문에서 반말은 단순히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쓰이는 건 아니다. 이 부장판사는 “판결문 주문은 국가 권력이 동원되는 강제 집행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명시해야 한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어느 정도 납득은 되지만, 그럼에도 말투가 주는 딱딱하고 권위적인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사실이다. ‘법대로 합시다’라는 말도 있듯이 흔히 법은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이런 법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니. 게다가 판결문에 익숙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긴장되는 마음으로 받은 판결문에 고압적인 말들이 가득하다면, 그 무게는 더 무겁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각양각색 수많은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지만,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있다. 바로 언어다. 글이든 말이든, 그 형태는 조금 다를지라도 언어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 늘 함께한다. 그래서 집단의 특성을 잘 드러내기도 하고,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혜연님”, 이대학보에서 나를 부르는 말이다. 국장부터 신입기자를 비롯해 학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존대한다. 신입기수였을 때부터 부장이 된 지금까지 늘 그렇다. 갓 신입기자가 됐을 당시엔 무척 신기한 경험이 었다.

처음 학보사에 들어왔을 때 내가 반말을 듣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거기엔 처음으로 공적인 조직에서 일을 하며 느꼈던 긴장감과 매주 무사히 신문을 내기 위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학보사의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결정적으로 기수도 제일 낮고 나이까지 제일 적으니, 내가 이곳에서 존대를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살아왔던 탓이 컸다.

이대학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언어 를 공유한다. 생각지 못한 존대를 받으니, 초반엔 과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고 불편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익숙하지 않은 거였다.

학보에서 받는 업무 지시 대부분은 나에게 선택권이 없었지만, 개인으로서는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존댓말로 포장해 좋은 말인 척 선임기자가 말도 안 되는 업무를 내리는 일은 없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항상 전제됐으니,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었다.

존댓말이라고 해서 업무 지시의 정당성이나 당위가 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존대를 받는다고 이곳에서 으스댈 수 있는 사람이 되지도 않았다. 존댓말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담긴 표현일 뿐, 저자세를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20년간 갖고 있던 생각을 바꾸고 적응하는 데에도 깨달음의 시간이 필요했다. 70년 넘게 지속된 관행을 바꾸는 일은 오죽할까.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라는 기관의 특성상, 이러한 변화가 확산되고 자리를 잡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법원의 권위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존댓말은 서열이 아닌 예절의 문제다. 또, 말투를 바꾼다고 해서 무너질 권위라면 문제는 말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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