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문제와 환경정치

1. 환경운동과 진보정치 서구에서 공해산업에 대한 자발적 저항운동이 일어나던 1970년대 환경운동세력들은 자신들을 좌도 우도 아닌 「새로운」사회운동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좌우의 어떤 정당과도 동맹을 거부한 적이 있다.

이에 반해 좌익정당들은 환경운동을 생존권운동 차원의 심각한 현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배부르고 할일 없는 쁘띠부르조아들」의 정치놀이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서구 환경운동은 정치세력화에 성공, 좌우정당을 압박하여 이들을 공히 「녹색화」하는 커다란 정치변동을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운동세력의 오늘날 이념적 모습은 좌우정당의 피안에 있는 세력이 아니라, 반우익적, 친좌익적, 친노동자적인 진보성을 띠고 있고 기꺼이 기존의 좌익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서구에서 지난 20년은 모든 정치세력의 자기 정체성이 뒤흔들리는 변모를 겪었고 동시에 거듭되는 정치적 실수의 세월이었다.

그간의 실천은 환경운동의 조직적 독립성을 해소시키지는 않았을지라도 이 운동을 범좌익진영에 귀속시킨 것이다.

이와 함께 근대적 좌우대립의 피안에 위치한다는 환경운동세력의 초창기적 자기과신을 이념적으로 지원하던 「포스트모던」정치이론도 서구에서 오늘날 다시 시들해졌다.

환경정치학의 이론적 과제는 이러한 20년간의 정치변동을 그 토대에 있어 설명하고 환경문제와 계급문제의 친화성 관계를 해명, 새로운 진보정치운동의 가능성을 정식화하는 것이다.

2. 내포적 재산업화, 환경문제, 계급관계 서구의 지난 20년간은 환경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시기이면서 동시에 「스태그플레이션」의 지리한 체제위기 속에서 생산방식(성장유형)이 조용히 변화되던 시기였다.

19세기 산업화혁명 과정은 일단 경공업(소비재)부문을 기계화하였다.

기계화과정의 특징을 인간노동을 기계투입의 지속적 확대로 점점 내몰고 잔존하는 노동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경공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자 기계의 수요가 줄곧 확대되었다.

그러나 기계를 생산하는 생산수단 생산부문은 과정이 복잡하고 수많은 부품들의 조합으로 완제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경공업부문의 노동과정처럼 기계화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 내내 생산수단 생산부문은 수공업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이로 인해 기계류의 생산증대가 이 수공업적 질곡으로 인해 난관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제일 먼저 미국 산업은 테일러 - 포드시스템으로 「으시대는」 수공업적 기계제 조공들의 「늑장노동」이 만연된 생산재부문의 이 수공업적 질곡을 분쇄하는데 성공한다.

이 노동시스템은 기계화하지 못하는 생산재부문의 노동형태를 표준화하여 노동자들로 하여금 「기계처럼」일하도록 강제하는 노동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모를 통해 기계생산의 확대가 가능케 되어 소비재부문의 기계화는 가일층 심화되었다.

기계화와 결부된 이 테일러-포드체계는 생산재부문과 이 부문 자본을 확대하여 20세기의 소위 「중공업시대」를 열어 놓는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산업화과정은 경공업(소비재) 부문에 더 많은 기계를 투입하여 필요노동을 상대적으로 줄임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따라서 확대일로의 기계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재 생산부문은 지속적으로 팽창되어야 했고 이 부문의 성장은 지속적인 기계화 덕택에 생산성이 증가하여 더 효과적으로 수요를 감당해 나간 소비재부문의 성장속도보다 몇 곱절 더 빨라야 했다.

이 과정은 소비재(경공업)부문의 완만한 성장에 대비되는 생산재부문(중공업부문)의 과잉비대를 가져왔다.

이것을 「외연적 확대재생산」이라 부른다.

오늘날 환경위기는 추상적으로 산업화의 결과라고 얘기된다.

그런데 외연적 성장유형에서 중공업부문이 소비재부문보다 몇 곱절 빨리 성장하였다면, 이 외연적 성장으로 인한 환경파괴(산업공해와 과도한 원자재채취)의 압도적 책임은 소비재 생산부문이 아니라 중공업부문에 있다.

소비재부문의 공해와 복지쓰레기는 중공업부문의 공해요소들에 비하면 약소한 것이다.

이 테제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모방하여 「중공업우선정책」을 고집하였던 (따라서 소비재부문과 소비생활이 빈약했던) 소동구의 환경 파괴도 설명해 준다.

여기로부터 얻어지는 정치적 명제로서 올바른 황경운동의 정곡은 「생활쓰레기 줄이기 운동」이 아니라 중공업부문과 이 부문의 자본(독점재벌)에 대한 환경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구에서 독점자본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당은 환경운동을 탄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중공업부문은 서구에서 새로운 생산방식의 등장으로 사양화하고 있다.

이 새로운 생산방식은 산업로보트 등의 신기술과 도요다생산조직에 기초하여 생산수단의 효율화를 통한 생산수단의 획기적 절약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효율적 절약을 통해 성장하는 경제형태는 「내포적 성장」으로 불린다.

현재 서구는 이 「내포적 재산업화」의 초기단계에 이입해 있다.

서구에서 환경부담을 경감시키는 이 내포적 성장유형으로의 이행은 노동조합의 강력한 실존으로 말미암아 강제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환경운동세력의 초기 인식과는 달리 실은 간접적인 환경운동이었다.

이것은 환경운동이 실질적인 환경개선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노동운동과 동맹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서구에서 이미 관철된 녹색-적색 연립정부들은 이러한 논리의 실천적 표현인 것이다.

게다가 환경운동의 주요지지세력인 「청빈한」화이트칼라 임금노동자들은 이 내포적 성장과 더불어 육체노동자들의 감소와 함께 지속적으로 늘어나 제각기 노동조합을 구성하여 노동총동맹의 산하에 편재되어 있다.

이렇게 볼때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은 임금노동자계급의 두 가지 운동형태로 기술될 수 있고 현재 성립해 있는 노동-환경정치동맹은 일시적인 타협이 아니라 원칙적인 단일계급적 항구성을 가진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새로운 생산방식의 관철과 함께 환경문제와 계급문제, 환경운동과 노동운동 간의 긴장대립은 해소될 수 밖에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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