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생산과 소비로 인한 지구의 젊은 죽음

황폐한 젊은 얼굴 늙지도 않았는데 황폐한 얼굴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 얼굴에 지나갔을 엄청난 불행과 모순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아마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젊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일 정도로 비참하리 만큼 황폐한 얼굴이 아마도 젊은 장발장의 얼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또한 요즈음의 자연의 얼굴이기도 하다.

도처에서 자연은 몸살을 앓고 있다.

공장의 굴뚝이 시커먼 연기를 하늘을 향해 피어올리고 거리의 자동차들은 그 맵시를 뽐내며 배기가스를 품어낸다.

그 자동차를 타고 출근한 야심있는 직장인들은 냉난방시설이 잘된 빌딩덕택으로 여름엔 냉방병 걱정을 하고 겨울엔 스키를 타러갈 꿈을 꾸면서 회사일에 전념한다.

생존경쟁이 치열해서 늘 긴장해야 하는 그 회사일이라는 것은 대부분 공장의 시커먼 연기와 하천을 타고 거품을 내며 흐르는 진한 잿빛의 강물, 그리고 우리가 흔하게 쓰는 일회용품이나 그 비슷한 쓰레기를 남기는 것과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율적으로 만들어지는 의미처럼 일반적인 상식은 특정한 표현은 그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에 의해 그 표현의 의미가 충족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언어이해를 뒤엎은 것이 바로 언어에 대한 데리다의 이해이다.

반실재론적 의미이론이라 할 수 있는 소쉬르의 언어이론을 발전시키고 있는 데리다에 따르면 특정한 기표(signifier)의 의미를 보장해주는 것은 특정한 세계에 대응하여 존재하는 기의(signified)가 아니라 기표의 차이들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는 기표들의 차이들이 무한히 증식될 때 산출되고 심화된다.

그리고 기표들의 차이들은 자율적이고 임의적으로 그들의 상호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떻게 그 차이들이 발생하며 발생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무력하다.

이렇게 볼때 훗설이 믿었던 것처럼 주체는 세계구성에 있어서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현상학적 환원의 주체라고 상정된 의식은 오히려 주체를 초월하는 담화(discourse)에 의해 매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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