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의료 활동은 어떤 의미에서든 고됩니다. 저를 비롯한 이곳 의사들은 가장 힘든 환경에서 일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상황입니다. 저도 로제타 홀 선생님도 가능한 많은 환자를 진료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입원 환자 외에도 외래 환자들로 진료소가 매일 가득 찹니다.” 

-박에스더 선생이 루이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 中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선생 제공=홍보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선생
제공=홍보실

열악한 의료 환경, 박해 받는 기독교, 의료에 무지한 사람들, 그 속에 박에스더 선생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본명은 김점동이다. 김점동은 그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고, 에스더(Esther)는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선교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 올링거(F. Ohlinger) 목사에게 받은 세례명이다. 에스더, 히브리어로 ‘별’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름처럼 여성 의료의 빛을 밝혀주는 별 같은 존재가 됐다.

박에스더 선생은 광산 김씨 김홍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1885년 한국에 선교를 온 미국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 의사와 아펜젤러 부부가 박에스더 선생의 집 근처로 이사를 오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됐다. 

아버지 김홍택은 경제적 어려움을 덜고자 아펜젤러 부부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후 셋째 딸인 박에스더 선생을 스크랜튼 여사가 있는 여학교로 보냈다. 여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교육, 음식, 옷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곳이 바로 이화학당이다. 박에스더 선생은 1886년 10살의 나이로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 됐다.

이화학당 졸업 후 1890년 가을부터 그는 보구여관에서 의료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선생을 도와 통역과 의료 보조를 맡았다. 당시 조선 여성들은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구여관은 그런 조선 여성을 보호하고 진료하는 의료 기관이었다. 

“점동은 눈치가 빠르고 영리해 훈련시키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학생이다. 나는 그에게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사랑스러운 에스더, 그는 나의 ‘참된 위로자’다. 그의 사랑과 애정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를 내 곁에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로제타 선생의 일기문에 묘사된 박에스더 선생의 모습이다. 박에스더 선생은 우수한 학생일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1893년 봄, 박에스더 선생은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박여선이라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청년과 결혼한 후 남편 성을 따라 김에스더에서 박에스더가 됐다. 

박에스더 선생은 남편과 함께 로제타 선생을 따라 평양으로 가 의료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의 선교는 녹록지 않았다. 당시 평양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박에스더 부부와 로제타 선생은 평양 간수들에게 협박을 받고, 집주인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박에스더 부부와 로제타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평양 여성들을 돌보며 선교를 계속했다. 

박에스더 부부는 평양에서 다시 미국으로 선교를 떠났다. 미국에서의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 박여선은 생활비와 박에스더 선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농장과 식당에서 막노동을 했다.  

박에스더 선생은 피나는 노력과 남편의 헌신덕에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대학 졸업 후 한국으로 귀국해 보구여관과 평양 광혜여원에서 환자 진료에 매진했다. 

환자 진료뿐만 아니라 조선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박에스더 선생은 그들을 교육하고 계몽해 삶의 변화를 가져다줬다. 

이후 여생도 환자 진료에 매진했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5년 동안 서울 보구여관과 평양 광혜여원을 오가면서 약 2만1132건 이상의 진료를 했다. 고종황제는 이런 박에스더의 공로를 인정해 환영회를 열기도 했다. 

완벽해 보이는 인생이지만, 박에스더 선생은 사랑하는 이를 세 명이나 잃는 아픔을 겪었다. 평양에서 선교할 당시 첫 아이를 출산했지만 36시간 만에 사망했다. 이후 미국이라는 낯선 타지에서 조산으로 둘째 아이를 잃고, 남편 박여선을 폐결핵으로 떠나 보냈다. 

당시 박에스더 선생의 나이는 스물셋. 이른 나이에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됐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의료 활동과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평생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 박에스더 선생은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했다. 1910년 4월13일 그는 폐결핵으로 34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4월13일. 오늘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0주년 되는 날이다. 의료 환경과 여성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박에스더 선생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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