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논의의 제문제들을 분석한다-<1>주체, 비개체, 해체, 총체 전체역사의 가치지향성 바탕한 근본적 억압구조 해체 (이주향 철학과 강사) 로라와 탕자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로라는 그 후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실은 그런 질문은 우문이다.

로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테니까. 인형의 집밖에서의 로라의 운명은 어떤 점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탕자의 운명을 반복한다.

결국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탕자의 최상이었던 것처럼 로라의 최상의 삶은 남편이 있는 「인형의 집」안이다.

탕자나 로라의 방황이란 극단적으로 말하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탕자의 위상이나 돌아갈 집이 있는 로라의 운명은 안정적이면서 절망적이다.

언제라도 용서를 빌기만 하면 관대하게 받아들여주는 거처가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라면 그 거처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어떠한 몸부림도 가위눌림처럼 헛된 몸짓으로 만들어 버리는 악몽이란 점에서 절망적이다.

탕자나 로라가 그들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규정하는 「피할 수 없는 세계」의 파수ㄲNㄴ이 되는 길이다.

물론 약자가 압력에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호 압력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약자가 압력이 된다는 것은 앞잡이가 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절망적 상황을 절망감으로 체화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열정을 그 상황을 돈독히 하고 강건하게 하는데 바치는 앞잡이란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이름이지만 치졸한 이름이어서 동정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는 어려운 이름이다.

주인의 힘을 자신이 잘난 것으로 착각하는 앞잡이란 체계의 피해자이면서도 『나는 체계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착각에 황홀해 하는 자이며,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환영 속에서 ㅆJㄱ어자고 곪아가는 자신으 내면을 망각하는 자들이다.

빈곤이나 차별대우를 권리처럼 보장받고 살아온 사람들은 억눌림 곳에서 작아질대로 작아져 억울하다는 소리조차 못하는 억울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허위를 허위로 인정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자들은 가해자라기 보다 피해자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해체시켜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거대한 체계가 된다.

우리가 해체시켜야 할 것, 우리의 절망의 근원이 되는 것으 그와 같은 앞잡이를 만드는 거대한 괴물이지 앞잡이는 아니다.

소외된 해체 해체라는 말은 유행처럼 퍼지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적 개념이다.

악을 규정함으로써 선으로서 드러나는 신처럼 광기를 억압함으로써 진리로서 드러나는 이성을 해체 하려 했던 푸코나, 본질과 현상의 구별을 가진 현전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려 했던 데리다, 그리고 헤겔식 인식온으로 드러나는 체계적 인식론을 해체하려했던 알퉤세르에게는 분명히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 존재한다.

물론 그것은 이성과 비이성, 선과 악, 진리(지식)와 허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대립구도 속에서 드러나는 이성, 선, 진리, 남성적인 것의 목력구조에 대한 해체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해체가 해체되어야 할 상황과 무관하게 유행으로 떠돌때, 그것은 또 얼마나 우리를 기만하게 되는 것일까? 찢어진 청바지 , 맵시있 는 차, 트로픽 오렌지, 통굽구두,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커피전문점, 그리고 주말여행등과 함께 놀려 하는 해체라는 말은 우리를 싱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황라게 한다.

단지 무료하고 심심하고 불안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남발되는 「해체」라는 말은 전체에 대한 통찰을 방해함으로써 「해체」라는 말을, 해체할 상황으로부터 소외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언어공동체적 틀이라는 이름으로전체에 대한 통찰을 중요시하는 정대현은 인산의 원초적 능력으로서 반성적 능력을 강조한다.

만일 해체가 의미있는 것이라면 전체를 반성적으로 조망함으로써 가능한 해체만이 의미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반성적 주체는 해체되지 않는다.

해체되어야 할 것은 인형의 집 이외에서는 삶을 선택할 권리가 없는 로라의 상황이나 살기 위해서는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 하고 , 인간답게 사는 유일한 통로란 게 삶의 마감일 수 밖에 없었던 전태이르이 상황처럼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상황에대한 해체인 것이다.

그리하여 정대현은 포스트모더님즘의 논의를 전체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반성적 주체를 해체하지 않는 범위 내로 한정시키다.

도대체 『나는 나만의 새계를 고집한다』면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트로픽 오렌지를 바르고 맵시있는 차를 타고 동반여행을 떠나는 , 기존의 관습에 대한 해체는 왜 기존의 상황에 대한 도전일 수 없고 해체일 수 없는가? 근검절약으로 살아왔던 우리의 부모들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들의 삶이 형식을 해체하고 개성있는(?) 문화(?)를 주도하는 신세대, X-세대, 미시족, 오렌지족, 야타족 등의 이름은 무엇때문에 해체의 표상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개성표현에 능란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나만으 세계를 고집하기 때문에 기존의 관습을 무시하는 이들의 자기표현은 왜 해체일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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