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정외·09년졸)‘듣똑라’ 제작자 및 진행자 · 중앙일보 기자
이지상(정외·09년졸)‘듣똑라’ 제작자 및 진행자 · 중앙일보 기자

기자로 일한 지 올해로 11년차가 됐다. 여러 부서를 돌아다녔지만 가장 오랫동안 일한 곳이 정치부, 그중에서도 국회였다. 입사 후 3개월이 채 안 됐을 때부터 국회 출입을 시작했고, 많은 당이 없어지고 생겨나는 걸 지켜봤다.

스물여섯 살 처음 가까이서 본 국회는 ‘내가 적응해야 하는 사회의 틀’ 같은 존재였다. 당 대표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국회의원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채로 입사한 나는 300명의 사무실이 있는 의원회관을 하루에 10개씩 다니며 매일 꼬박꼬박 의원 얼굴과 지역구, 특이사항을 외웠다. 누구는 80년대 운동권 어느 계열이었는지, 사법시험 몇 기인지, 어느 의원과 친소관계가 있는지 등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눅 들곤 했다.

당시 썼던 일기를 보면 나는 늘 ‘이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나는 잘 모르는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기사로 전달해도 될까’, ‘정치 9단들이 보면 내가 뭣도 모른다는 걸 아는데 비웃으면 어떡하지’, ‘나도 얼른 이 사람들처럼 늙고 싶다. 익숙해지고 싶다’라고 썼다.

 

0.5%로 시작한 여성의 자리 70여 년 지나 간신히 17% 넘어

당사자들은 간데 없고 냉소와 혐오의 악순환 반복

정치 주체 영역에 더 많아져야

자기비하에 시달리면서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싶었다. 늘 과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의 문법을 이해하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외우면서 청춘을 보냈다. 내 출입처인 정당에서 일어나는 작은 먼지 같은 얘기도 ‘내가 모르면 진다’는 생각에 일주일 내내 정치인들과의 술자리에 따라가기도 했다. 국회 생활이 익숙해진 뒤에도 당내회의기구나 국회 상임위 논의과정에서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들이 오고갈 때면 ‘내 생각과 다르지만, 이들은 다 계획이 있겠지’, ‘나는 아직 어려서 뭘 모르겠지’라는 생각으로 산 적이 꽤 많았다. 내가 볼 땐 이 부분도 중요한 것 같은데 정치인들이 한 마디도 안 할 때면 ‘내가 잘못 생각했나? 저 사람들도 분명히 알고 있을 테니 무슨 생각이 더 있겠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게 내가 11년차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후회하는 부분 중 하나다.

내 경험, 아니 ‘우리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오히려 정치현장에서 한 발 벗어난 뒤였다. 지난해부터 ‘밀레니얼의 시사친구’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새로운 미디어 서비스 ‘듣똑라’(듣다보면 똑똑해지는 라이프)를 시작하면서 현장에 없는 채로 정치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기존 뉴스가 불친절하다고 느끼는 2030을 위해 뉴스에 맥락과 흐름을 더한 오디오·비디오·뉴스레터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여기서 현장 출입기자가 아닌 채로 콘텐츠를 제작하다보니 한 가지 보이는 게 있었다. 바로 ‘시민으로서의 감각’이다. 솔직히 말하면 현장 출입기자일 때는 취재원과는 매우 가까웠지만, 독자는 매우 먼 존재였다. 나 역시 정치공학이 우선시되는 많은 일들을 보며 익숙해지고, 시민들이 정치권에 대해 비난을 쏟아낼 때마다 ‘다 사정이 있는데 몰라서 그래요’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현장 안에서의 나는 어떻게든 기를 쓰고 그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간 다음 정확하게 이를 퍼 나르는 데만 집중했었던 셈이다. 그런데 밖으로 나와서 정치 콘텐츠를 제작하려 하다 보니 ‘그래서 그 사람 생각이 유권자들의 목소리와 얼마나 일치하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이제서야 보였다니 창피한 일이다.

다음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을 앞두고 ‘n번방’ 국민동의청원 관련한 국회의 처리과정을 보면서 더욱 그 마음이 커졌다. n번방은 텔레그램을 통해 미성년 여성들의 성착취물을 공유해온 중대한 범죄다. 프로젝트 리셋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들이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여러 통로를 통해 디지털성범죄의 공포에 대해 역설해오지 않았나. 이화 안에서 이 칼럼을 읽는 우리 모두 공감하는 문제라 생각한다.

2030여성들에게는 ‘배고프면 밥 먹는다’처럼 ‘디지털성범죄는 중대한 범죄다’라는 말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당연한 얘기지만, 국회에선 그렇지 못했다. n번방 관련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은 제도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10만 명의 동의를 넘어선 안건이었다. 청와대 청원과 달리 한 달 내에 10만 명이 동의하면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돼 심사를 받을 수 있게 되는 절차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절실하다는 방증이었다. 청와대 청원에는 무려 5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n번방 처벌’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국회 대응은 어땠던가.

국회는 수많은 디지털 성착취물 유형 중 일부인 딥페이크 처벌 규정만 신설했다. n번방의 극악한 범죄유형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논의하는 내내 국회의원과 공무원들은 정확히 n번방 사건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소위 ‘n번방 사건’ 저도 잘 몰라(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청소년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김오수 법무부 차관)”라고 말한 소관 부처 공무원부터 “청원한다고 법 다 만드나(미래통합당 김도읍 의원)”,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갖고 나 혼자 즐긴다, 이것까지 (처벌로) 갈 거냐(미래통합당 정점식 의원)”, “나 혼자 스스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다(더불어민주당 송기헌 의원)”고 말한 국회의원들이 있었다. 이게 평균나이 55.5세, 남성비율 86.9%의 20대 국회의 현 주소다.

1948년 제헌국회는 여성국회 1명, 성비 0.5%로 시작했다. 비례대표 여성할당제 법안이 통과된 후 2004년이 돼서야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0%대를 넘어섰다. 그러나 그 후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 의원 비율은 17.1%. 그간의 사회 전반 여성 참여율 증가를 고려하면 정말 느린 반응이다. 게다가 청년 정치인이 희소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국회에서 ‘2030 여성’의 목소리에 대해 당사자성을 가진 정치인은 없다고 봐도 될 정도다. 이처럼 과소대표 되다보니 여성들이 보기에 정치 영역은 ‘진짜 나를 대표해주는 사람이 없는 곳’이고, 그렇다보니 정치에 대한 냉소와 혐오가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 더 많은 여성의제와 여성 정치인이 정치 영역에서 주체로 등장해 당사자성을 높이길 바란다. 그런 정치가 4월15일에도 있었으면 한다.

이지상 중앙일보 기자·‘듣똑라’ 제작자 및 진행자

키워드

#이화:연칼럼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