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건네는 위로, 각양각색의 여성을 그린다
영화로 건네는 위로, 각양각색의 여성을 그린다
  • 김해인 기자
  • 승인 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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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성 감독들이 영화계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리틀 포레스트’(2018), ‘벌새’(2018), ‘메기’(2018), ‘보희와 녹양(2018)’ 등 지금껏 보지 못한 시선과 감성을 개성있게 담은 영화들이 각종 상을 타며 한국 영화계의 지평을 넓혔다. 외국 역시 ‘가버나움’(2018), ‘레이디 버드’(2019),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등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으며 화제가 됐다. 루카스 필름의 캐슬린 케네디(Kathleen Kennedy)는 가디언즈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스타워즈 영화는 여성감독이 감독을 맡게 될 거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본지는 여성의 날(8일)이 있는 3월을 맞아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 주연 영화 3편을 소개한다. 세상과 고군분투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그마한 위로를 건넨다.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이옥섭 감독의 ‘메기’(2018)

영화 '메기'
영화 '메기'

믿고 의심하고 배신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영화 ‘메기’(2018) 속 주인공 윤영(이주영)은 ‘믿음’을 뒤흔드는 사건들 속에서 진실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는 마리아 사랑병원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한 남녀의 성교 장면이 찍힌 엑스레이 사진이 공개되며 병원은 발칵 뒤집힌다. 병원 간호사 윤영은 그 사진이 남자친구 성원(구교환)과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라고 의심해 사직서를 낼까 고민한다.

영화에선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병원 물고기 ‘메기’의 나레이션이 계속해서 흐른다.

“병원 사람들의 탐정놀이가 시작됐습니다. 누가 이 사진의 주인공인지. 엑스레이 버튼을 눌러 남의 사생활을 찍은 자에겐 관심도 없죠. 찍힌 게 누구인가, 그것에만! 그것에만 관심을 보였어요.”(메기)

메기의 말처럼 민망한 엑스레이 사진으로 마음 졸이는 건 윤영과 같은 개인 뿐이다. ‘내가 찍힌걸까’ 고민하다 병원마저 떠나려하는 윤영의 모습은 현시대를 아프게 꼬집는다.

이옥섭 감독은 유튜브 채널 ‘The ICONtv’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수색교 근처 공중화장실에서 불법 촬영 카메라가 나왔다고 하면, ‘어? 나도 어제 거기 갔었는데’ 하면서 불안해지잖아요. ‘나도 찍혔을지 몰라’하는 불안감을 갖게 되고, 그래서 그 소재에 자연스럽게 다가갔던 것 같아요.”

엑스레이 사진 사건을 시작으로 윤영과 주변 인물들은 누군가를 의심하고 자신이 의심 당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인물들은 계속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신이 만든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믿었지만 배신당하고, 거짓이라 의심했지만 사실이었던 모순적인 상황들 속에서 윤영은 길을 잃는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누구의 말이 사실인가’, ‘진실은 무엇인가’, 머리가 복잡한 윤영에게 어항 속 ‘메기’는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메기는 윤영에게 말한다.

“윤영씨! 사실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대요. 사실은 언제나 사실과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만들어진다고 아빠가 그랬어요.”(메기)

편집되고 만들어지는 사실들, 그 속에서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는 진실이란 없다. 유일한 진실은 사실이 온전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뿐이다. 이 감독은 불규칙한 불신과 믿음의 과정은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영화는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믿을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그렇게 생긴 믿음은 계속해서 쌓이고 또 깨지기 마련이다. 영화는 구덩이에 끝없이 빠지게 될 우리들에게  류시화의 산문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2019)’에 나오는 한 구절을 전한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집은 없지만 취향과 생각은 있어,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2018)

영화 '소공녀'
영화 '소공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수많은 철학자들은 이 질문의 답을 위해 밤낮을 새워 가며 고민했다. 하지만 ‘소공녀’(2018)의 미소(이솜)에게 이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담배, 위스키, 그리고 한솔이 너. 그게 내 유일한 안식처야.”(미소)

미소는 집이 없다. 담배와 위스키, 남자친구 한솔(안재홍)을 사랑하는 그녀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쓰는 만큼만 벌어 사는 미소는 월세가 오르자 담배, 위스키 대신 집을 포기한다. 더 싼 월셋집을 찾는 동안 미소는 밴드 동아리를 함께했던 다섯 명의 친구들에게 잠시 신세를 지려 한다.

삶을 여행하듯 살아가는 미소와 달리 친구들은 하루하루 삶을 버티고 있었다. 야근 때문에 회사에서 몰래 포도당을 맞는 문영, 시댁 식구와 남편 뒷바라지에 눈물을 흘리는 현정, 이혼 후 집 대출금만 남은 대웅, 결혼하지 못해 부모님의 간섭을 받는 록이, 좋은 집에 살지만 남편 눈치 보며 사는 정미까지. 이들은 집이 있지만 편히 쉬지 못했다.

전고운 감독은 ‘LIFEPLUS’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다. “집값이 비싼 서울에서 자기 공간을 가지기 위해 사람들이 포기하는 것이 좀 많은 것 같았어요. 저는 포기도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 (포기하려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되잖아요. 저는 미소가 그걸 잘 아는 친구고 그 점이 아주 존경스럽다고 생각해요.”

정미는 저녁식사를 하다 미소와의 대화가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자 미소에게 집에서 나갈 것을 통보한다.

영화 '소공녀'
영화 '소공녀'

“요즘 담뱃값이 올랐다던데, 집이 없을 정도로 돈이 없으면 나같으면 독하게 끊었겠다.” (정미)

“알잖아. 나 술담배 사랑하는 거.” (미소)

“아이고, 그 사랑 참 염치없다야.” (정미)

미소는 집이 없다는 이유로 부끄러움마저 모르는 인간이 됐다. 미소의 행복들은 사회의 기준과 맞지 않아 쉽게 무시받는다. 친구들은 담배와 위스키 때문에 집을 나온 미소의 삶이 어딘가 미숙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삶에 지친 친구들을 위로해주는 건 집이 없는 미소였다. 톡하고 건들면 터질 것 같은 친구들과 달리 미소는 언제나 단단하다.

영화 ‘소공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묻는다. 담배와 위스키를 사랑하는 미소의 모습은 사회에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잠깐의 미소를 선사한다.

 

△사랑을 닮은 삶에 대하여, 그레타 거윅(Gretta Gerwig) 감독의 ‘작은 아씨들’(2019)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살면서 ‘사랑’이란 단어는 너무나도 많이 들린다. 노래 가사에서, 책에서, 영화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말한다. 영화 ‘작은아씨들’(2019)은 삶을 열렬히 사랑하는 네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모습을 전한다.

영화는 네 자매 중 둘째인 조(시얼샤 로넌,Saoirse Ronan)가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파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성공적으로 원고를 판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뛰어간다. “좋았어!”하고 외치는 조의 모습엔 기쁨이 가득하다.

영화 '작은 아씨들'
영화 '작은 아씨들'

“조 마치는 영원히 기억될 거에요”라고 말하는 조는 그 무엇보다 자신과 글을 사랑한다. 하지만 당시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작가라는 영역에 애정과 힘을 쏟고 있는 나머지, 조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여력이 없다. 옆집 청년 로리(티모시 샬라메, Timothee Chalamet)는 조에게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왔다”며 애절한 고백을 하지만 조는 “널 사랑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영화의 배경인 1860년대 미국, 조는 여성들이 사랑만을 위해 꿈과 재능을 포기해야 하는 사회에 신물이 난다. 하지만 자매들과 로리가 떠나자 사람의 온기와 그들이 주던 사랑에 그리움을 느낀다.

“여자도 감정뿐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어요. 외모뿐 아니라 야망과 재능이 있고요. 사람들이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는 게 지긋지긋해요.”(조)

그렇게 말한 조는 울먹이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너무 외로워요.”

영화 속에서 각자가 살아가는 ‘현재’의 일상은 차가운 색감으로, 네 자매가 함께 살던 ‘과거’의 집은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된다. 서로 장난치고 싸우고 같이 연극을 올리던 과거의 일상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와 부딪히느라 지친 조는 영혼에 따뜻함을 채워주던 그 사랑이 그립다.

하지만 영화에서 결혼은 사랑의 결실로 그려지지 않는다.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을 주장하는 로리에게 막내 에이미(플로렌스 퓨, Florence Pugh)는 답답한 듯 말한다.

“여자는 돈 벌 방법이 없어. 생계 유지나 가족부양도 힘들어. 돈도 없지만 만약 있더라도 그건 바로 남편의 소유가 돼. 아이를 낳아도 남편 소유야. 그러니까 거기 속편하게 앉아서 결혼이 경제적인 거래가 아니라고 하지마.”(에이미)

네 자매는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는 시대에 태어났지만 결코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없다. 또 사랑이란 말은 지긋지긋하지만 밀려오는 외로움에 사랑을 원한다. 이런 이들의 삶은 사랑스러우면서도 애잔하다. 성경의 한 구절,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이 이제는 와닿는다. “제일 어려운 게 사랑”이고, “제일 필요한 게 사랑”이라서 그런 것 아닐까.

“이 이야기는 오래된 19세기 시대극 상황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허락하는 것보다 더 멀리 가고자 꿈꾸는 여성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그레타 거윅)

영화의 배경으로부터 150년이 넘게 흘렀지만 이들의 인생은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네 자매의 이야기는 이 시대 여성들에게 삶을 사랑할 용기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