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주(국문·90졸) 소설가

대학 졸업식을 두 달 앞두고 취업에 성공했다. 진주MBC 아나운서였다. 지방이지만 부모님이 계신 곳에서 가까웠고, 서울 본사와 월급이 같았고, 정년이 보장된 정규직이었으므로 주변에서 다들 축하해 주었다.

2년 6개월 뒤에 사직서를 썼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은 낮에는 아나운서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것이었으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모자랐을 뿐더러 적당한 월급과 타협하며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나를 자꾸 주저앉히는 것 같았다.

아나운서를 그만 두자 주변에서 다들 의아해했다. 그 좋은 직장을 두고서 대체 왜? 한결같이 이어지는 질문 속에는 안정된 직장이 안겨주는 쓸모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었다. 어디든 내세울 수 있고, 따박 따박 월급이 들어오고, 폼 나게 일할 수도 있는….

3년 뒤에 단편소설로 등단을 하자 약간의 축하를 받았다. 약간의 쓸모는 있는 직업이라 생각들을 한 것 같았다. 4년 뒤 첫 장편소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책을 내자 꽤 많은 축하를 받았다. 꽤 쓸모있는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되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가는 아나운서보다 쓸모없는 직업이었다. 방송국을 그만둔 게 아깝다고들 했다. 소설가라는 이름도 어디 내세우기엔 나쁘지 않고 폼도 나는 일인데…. 결국엔 월급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적당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면 그다지 큰 쓸모가 없다는 생각.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한다. 세상의 모든 쓸모는 경제적인 면에서만 해석되고 이해된다. 소설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만족감이나 행복은 그다지 쓸모없는 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경제적 가치보다 더 큰 행복을 소설 쓰기에 서 느낀다.

그 행복은 등단을 준비하던 기간부터 시작되었다. 소설을 공부하는 방법 중에 필사(筆寫)라는 것이 있는데, 뛰어난 작가들의 빼어난 작품을 골라서 원고지에 그대로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는 공부다. 문학에 대한 열망만 가득할 뿐 막상 짧은 소설 한 편 써내지 못하고 힘들어하던 그 시절에 최후의 방법처럼 필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무작정 베껴 쓰는 그 과정이 소설의 구성 방법을 터득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서의 깊은 맛도 알게 해주었다.

내가 쓰는 이 글이 과연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해지면서 갑자기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질 때면 나는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뛰어난 작가들의 빼어난 작품들을 필사하듯 꼼꼼히 읽다보면 이 아름다운 세계에 나도 합류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나면서 무엇이든 다시 끼적이게 됐다. 그 시간이 쌓여서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는 힘들 때마다 책을 펼쳐들었다.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앞서는 시대, 문자보다 영상이 환영 받는 이 시대에 문학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질 때 오히려 책 속으로 빠져들면 거기에 답이 보였다. 영상 매체는 결국 문학이라는 광범위한 토대 위에 세워 올린 건축물이므로 책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것. 문학의 바탕인 철학과 역사도 책 속에 있다는 것. 영상 매체의 질을 좌우하는 과학적 기술과 지식 역시 책에서 구할 수 있다는 것. 결국, 모든 것은 책 속에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랑은 대체 어디에서 생겨나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때 토머스 루이스의 「사랑을 위한 과학」을 펼쳐본다. 사랑의 생물학적 실체를 파고들수록 연애는 점점 더 사소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울리히 벡 부부가 함께 사랑을 탐구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읽으며 사회학적으로 정리를 한 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통해서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성찰까지 끝내고 나면 사랑에 관한 세상의 소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희망이 없다는 생각만 들면서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때는 김주환의 「회복탄력성」을 읽으며 심리학적으로 트레이닝을 한 뒤 제임스 도티의「 닥터 도티의 삶을 바꾸는 마술가게」를 읽으며 신경외과 의사의 메스를 따라서 뇌와 심장의 잠재력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최재천의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를 펼쳐보자. 여성시대가 도래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사회생물학의 여러 이론들을 바탕으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에 위안을 받게 된다. 오래 전에 쓰인 이 책의 예언대로 이제는 남자의 화장이 보편화되었음을 돌아보면 어떤 통쾌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무슨 처방전 같은 이런 목록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테고리는 ‘무쓸모의 독서’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이라든지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 레몽장의 「오페라 택시」, 박상륭의 「죽음의 한연구」 같은... 당장 어떤 길을 보여주거나 속 시원한 해결법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더욱 가슴 답답한 현실을 드러낼 때도 있지만, 읽고 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들.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선 그 무엇이 느껴지는 책들.

이러한 무쓸모의 독서들이 빛을 발하는 때는 아마도 그 책을 읽은 이들이 가장 힘들고 불행해질 때일 것이다. 어둠 속에만 느낄 수 있는 빛, 어둠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빛이 그때 비로소 보일 것이다.

그러한 빛을 곁에 두고 싶다면 모쪼록 아무런 조건 없는 독서의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도서관에서든 서점에서든 손닿는 대로 책을 꺼내들고 뒤적이다가 마음에 와닿는 글귀가 있으면 끝까지 읽어보자.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책이 있으면 조금 지루해도 끝까지 읽어보자. 그리하여 마침내 눈감으면 떠오르는 작은 불빛들을 가질 수 있기를. 어둠과 적막 속에서만 느껴지는감각의 여백과 꿈틀거리는 상상력을 더불어 얻을 수 있기를.

고은주 소설가

*본교 국어국문학과를 1990년 졸업하고 1995년에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1999년 오늘의 작가상, 2004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2019년 노근리평화상 문학상, 이화문학푸른상을 받았다. 소설집 「칵테일 슈가」, 「시나몬 스틱」, 장편소설 「아름다운 여름」, 「여자의 계절」, 「현기증」, 「유리바다」, 「신들의 황혼」, 「시간의 다리」, 「드라마 퀸」, 「그 남자 264」, 동화 「너는 열두 살」, 「내 이름은 264」 등을 출간했다. 특히 항일 시인 이육사의 생애를 그린 신작 「그 남자 264」는 문재인 대통령이 읽고 친서를 보내 격려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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