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희 교수(사회학과)

오래 전에 한 라디오 방송에서 적극적 조치에 대한 논쟁에 참여한 적이 있다. 경제학을 전공한 어떤 남성 학자는 여성에 대한 고용상의 적극적 차별시정조치에는 반대했으나 초등학교에는 남성 교사를 추가로 할당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과거의 차별적 관행으로 시장이 얼마나 왜곡되었든지 간에 국가가 시장의 정상적인 작동을 제어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졌다면 그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적어도 시장을 신봉한다면 여성에게는 적용되어서는 안 되고 남성에게는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다 일관된 원칙이리라.

 

“특정인 비판하려면 모두에게 똑같은 잣대 적용해야”

 

조국 전 장관을 비호하고, 반일 구호를 외치게 했다는 전교조 교사에 대한 비판이 뜨겁다. 초등학교부터 구호나 포스터라면 진절머리 나게 겪었던 사람으로서 교육과 무관할 뿐 아니라 학생의 자유 의지에 반하는 전체주의적 지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예시로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라는 것은 과다한 요구이다. 그 정치적 중립성은 과연 누구의 판단에 근거한 것이며 그런 입장의 객관성은 어떻게 담보할 수 있는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그 교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자신의 사고와 신념 체계를 학생에게 강요했는가의 여부이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는 일관성을 위하여 전교조 교사든 그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교사든 똑 같은 잣대로 공평하게 비판이 가해져야 옳다.

 

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본인과 임명권자 모두 인정하고 사과한 자녀 교육과 관련된 특권 향유에 대해서는 지금이라도 조국 전 장관을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 문제는 조국 전 장관에 대한 비판이 이러한 특권적 지위를 남용하여 이득을 취한 모든 세력에 대한 일관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특정 개인과 그 가족에게 집중된 추측성 보도의 홍수 속에 이 문제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는 우리의 시야가 점 점 더 협소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배경을 가진 특정인에 대한 특혜가 부당하다면 경제적으로 더 여유롭다는 이유만으로 더 특수한 학교나 학원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는 기회 자체에 대해서도 좀 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또 대학입시에서의 공정성이 문제가 된다면 대학을 생각할 수도 없는 곤궁한 처지에 있는 뒤쳐진 청년의 공정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은 관심을 쏟는 것이 일관적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오랜 기간 자녀의 대학입시를 위해서 부모가 가진 모든 자원과 인맥을 쏟아 붙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그로 인해 교육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대신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 기존의 계층 사다리를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어버렸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절대로 뒤쳐져서는 안 되는 전쟁터에서 경쟁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들에 대한 관심이 들어설 틈이 존재할 리 없다.

 

“협소한 관점에서의 분석 아닌,

제도적 차원의 고민 필요해”

 

이 끝나지 않는 전쟁을 일으킨 배후에는 불평등한 노동시장이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왔는가의 여부가 이후 심각한 수준의 임금격차로 이어지는 현실이 대다수의 학부모를 전사로 만들었다. 이 무모하고 소모적인 경쟁은 학력과 학벌로 인한 차별과 격차가 합리적인 수준으로 조정되기 전까지 입시 제도를 어떻게 바꾸어도 결코 멈춰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전쟁터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지만 사회전체로는 엄청난 자원의 낭비와 희생을 발생시킨다.

제도는 한 사회에 특정한 결과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내 주변의 일들을 보다 더 큰 구조와 연결시켜 사고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사회적 과업과 제도에 대해 고민하는 것, 그래서 변화의 첫 걸음을 걸어내는 것, 이러한 이화의 정신이 더욱 더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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