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때에 맞게, 적절하게 잘 다뤄줘야 한다. 때를 놓치면 내면에서 곪아서 사람을 병든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감정을 다루는 방법은 살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무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관계에서 치대면서, 주변의 친구들이나 어른들을 보면서 스스로 깨우쳐갈 뿐이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극단의 방법만이 존재하는 듯 그냥 내뱉거나 참는다.

감정이란 것이 대개 그러하지만, 특히 분노라는 감정을 다루기는 상당히 까다롭다고 생각한다.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행동할지가 정해지고 그 결과는 현격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폭력이 될 수도, 성장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정도를 쌓아가면 쌓아갈수록 더 심하게 병들고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커진다.

최근에 나는 분노란 배출하기로 내뱉기로 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감정을 잘 소화해냈다는 의미가 아니다. 병들어 있는 내면이 더는 감정을 쌓아둘 수 없을 정도로 곪아서 선택하는 가장 게으른 방법으로서의 배출이다. 정확히 말하면 분노의 배출이 아니라 분노 찌꺼기의 배출일 것이다. 그 방법은 자신이 익명의 누군가가 되어 배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볼 일이 없기에, 그 사람은 나를 알 수 없기에 자신의 억눌렀던 감정들이 섞여 발현되는 분노를 쏟아붓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나에게 가해지는 해가 없어서 쏟아붓는 듯했다. 여기서 어떠한 사안이 나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상식과 일반이라고 말하는 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 사람을 욕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논리적인 비약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노인(憤怒人)들이 함께 한다면 그 물결은 누가 말려도 잡지 못할 정도로 거세진다.

이때 분노는 순식간에 증폭되고 상대를 향한 인신공격적인 조롱은 폭격처럼 가해진다. 인터넷에서만 그러할까. 인간관계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만연하다. 참아왔던 감정들이 분노로 탈바꿈해서 터지는 순간들. 나에게 위해를 가할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복종을 요구하는 말투들. 특정집단을 묘사하며 치는 드립들. 본래의 몸보다 증폭된 분노가 익명 너머의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순간들을 그동안 목격해왔다.

한번 물결을 타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분노는 과연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감정의 끝까지 내려가 그 근원을 파헤쳐야 한다. 그 과정은 상처를 동반하고 외면하고 싶을 수 있으나 내 안에서 발현된 감정을 직면하지 못하는 것은 나를 직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의 감정을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의 문제는 ‘내가 나를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하는 문제와 같다는 것이다. 소소한 감정들이 잘 다스려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관계없는 상대에게 분노로 분출되고 그것을 받은 사람은 또 분노가 쌓이고 그 공간이 분노라는 공기로 가득차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슬픔과 분노가 증폭되어 여러 문제를 낳는 또 다른 이유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사회가 당연한 나의 모습조차 부정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병든 사회에서는 기쁘지 않거나 밝지 않은 감정들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여겨진다. 슬픔, 분노라는 키워드가 나오는 순간 경직되는 분위기가 우리가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직면하지 못하게 만들고 부정하고 쌓아 두는데 일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사회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낙관적으로 사회인식 개선을 기대하며 끝내고 싶진 않다. 분노를 배출해버릴지 해소할지의 문제는 사회문제보다는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은 기쁘고 행복한 마음처럼 슬픔과 분노라는 감정도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는 어떠한 논리도, 잣대도 필요하지 않다. 묵혀둔 감정을 꺼내어 직면하는 것, 어떠한 가치의 개입도 없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모두에게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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