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사회·경제적상황 1945년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주었지만 통일된 민족국가의 건설과 사회경제적 변혁까지 가져다 준것은 아니었다.

해방직후 조선은 일제에 의해 왜곡, 재편성된 식민지 반 봉건사회로서 농업인구가 전취업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잇었으며 그중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가가 전농민의 85%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지주와 대립관계에 놓여있엇다.

노동자의 수는 1943년 143만명이었고 1944년경에는 약2백만명을 초과하고 있었으나 가혹한 식민지적 노동조건하에서 일본인 노동자의 반액에도 못미치는 저임금으로 장시간노동을 강요당해왔다.

따라서 해방된 조선의 과제는 토지문제의 해결과 국민총생산의 80%를 차지하고있던 일제 및 친일자본가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친일세력을 처벌하여 식민잔재를 청산할수 있는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등 민중의 각세력들은 해방의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해방직후부터 급속히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주권을 찾으려는 민중의 열기를 기반으로 아래로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인민위원회는 해방후 3개월만에 이미 종래의 행정체계에 따라 7도 12시 131군에 걸쳐 빠짐없이 골고루 정비되었다.

45년 11월에는 전국 15개 노동조합 18만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전국노동조합평의회라는 노동자의 단일한 산업별 조직을 결성하였고 12월에는 조합원 수가 이미 55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같은해 12우러에는 3백 30만지역 농민조합원을 대표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조직되었고 12월 22일에는 『조선의 완전한 해방, 자주독립은 조선인구의 반인 1천 5백만 여성해방없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한국의 여성운동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중조직인 「조선부녀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여성들은 그수에 있어서나 받고 있었던 억합의 정도에 있어서나 노동자, 농민, 청년과 함께 당시의 민족적 과제해결을 위한 중요한 세력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권력의 철수로 통일민주국가 건설이 필연적으로 제기되고 있었던 이 시기에 한편에서는 미군정과 특권지속을 위한 현상유지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이 결속하여 다른한편의 변혁적 정치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이 시기의 여성운동의 궤적을 보기로 하자. 해방직후 여성운동은 8월 17일 결성된 「건국부녀동맹」에서 시작되었다.

「건국부녀동맹」은 정치적 입장이나 일제시대의 행적에 관계없이 여성운동가들이 망라되었다.

교육계, 종교계, 전문직업인등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총망라되었는데 주로 일제시대의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여성활동가들로서 사회주의계 여성들과 기독교계 여성들이 함께 하였다.

여성운동의 출발 「건국부녀동맹」은「조선부녀의 유일무이한 대표적 집단조직」이었으나 결성된지 한달도 못되어 일부여성들이 탈퇴함으로써 분열되었다.

탈퇴한 이들은 일제시대 말기 식민지배정책에 소극적,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정신대 지원과 학도병의 전쟁참여를 독려했던 지식여성들이었다.

이들은 8월말 미군의 진주가 확실시 되자 자신감을 회복하고 「독립촉성 애국부인회」「여자국민당」등을 만들어 여권확립등을 내걸로 신탁통치반대등 우익정치운동에 여성들을 동원하는 정치활동을 하였다.

이 여성단체들은 이승만과 한민당등 단독정부 추진 세력의 한부분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여권확립을 목표로하는 여성단체들은 친일경력, 여성정책의 부재, 대중운동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조직적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한편 「건국부녀동맹」은 1945년 12월 22일부터 3일간에 걸쳐 「전국부녀단체대표자대회」를 열고 이 대회에서 「조선부녀총동맹」(이하 부총)으로 개편되었다.

「조선부녀총동맹」활동 전국의 148개 단체 대표 458명이 모여 결성된 「부총」은 각도에 총지부를 두었고 시, 군, 면, 읍, 리에 분회를 두어 중앙집권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조직의 근간은 각 마을단위와 공장단위의의 분회였다.

「부총」은 행동강령으로 『남녀평등의 선거권과 피ㅏ선거권, 여성의 경제적 평등권과 자주성 확립, 남녀임금차별제 폐지, 8시간 노동제 확립, 산전산후 각 1개원간의 유급휴양제 확립, 탁아소, 산원, 공동식당, 공동세탁소, 아동공원의 완비요구, 공사창제, 인신매매 철폐, 모자보호법 제정, 봉건적 결혼제 철폐』를 내걸고 이의 실현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부총」은 1946년 맹원이 80만명이었고 47년 8월에는 맹원 200만 획득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47년 남한의 여성인구 약960만명에 비교하면 적어도 전체여성의 약 10%정도는 조직화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농가부녀, 도시주부, 노동여성, 지식여성등이 이념적 주체로 설정되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각 계급 계층 여성들이 남한 각 도, 시, 군, 읍, 면,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여성운동은 정치이념에 있어서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었고 여성운동의 지도층은 과익정당의 지도층인 경우가 많았으나 여성운동이 좌익세력에 한정된다고 볼수는 없었다.

농사짓는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며 여성도 토지를 분배받을수 있다는 것, 일부일처제의 확립으로 봉건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일부일처제의 확립으로 봉건적 억압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것, 남성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등 여성운동이 제시한 전망들은 여성들로 하여금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였으며 집밖에 자유롭게 나다닐수 없는 조건으로 적극적 활동이 어려우 경우에는 절미운동으로 쌀을 모아 맹비로 내는등의 소극적 참여라도 하였다.

합법적인 여성운동이 가능했던 미군정초기(1945.8-1946.7)여성문맹퇴치운동, 공사창제폐지운동, 쌀요구투쟁 등은 여성대중운동으로 활성화되었고 전면적인 정치투쟁기(1946.7-1948.2.7)에는 수 많은 여성대중이 정치집회에 동원되었으며 모든 운동이 비합법화된 시점(1948.2.7이후)에서도 봉건사회에서는 생각할수 없었던 여성들의 투쟁력이 보이는데 이는 여성운동이 여성대중들과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지식인들은 스스로 봉건적 억압의 벽을 깨뜨리면서 동시에 대중과 유리되지 않고 밀착되어 여성운동을 이끌었는데 중앙에서 뿐 아니라 각 지방에서 연설, 교육, 조직활동에 앞장서면서 여성들도 지도자가 될수있음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확신시켰다.

여성대중들도 합법운동의 단계에서는 교육을 받고 집회에 참석하고 모임을 가지면서 그리고 비합법단계에서는 비밀연락, 은신처제공, 식사제공, 삐라살포, 유격대투쟁등 여성들이 나설수 없었던 투쟁에 직접 참여하면서 봉건적 남녀유별사상이나 여성비하의식을 깨뜨려 나갔다.

이상에서 살펴본 미군정기 여성운동의 성격은 첫째, 반제반봉건 여성운동의 맥을 이었다고 볼수있다.

미군정기 여성운동은 1920년대말 「조선여성운동의 과제는 민족해방, 무산계급해방, 여성해방이라는 세가지 과제의 동시해결」이라고 설정한 「근우회」운동과 그 이후 국내에서의 적색노조와 적색농조등 비밀계급조직의 부녀부, 건국동맹 부녀부의 운동, 해외에서 민족해방을 위한 무장투쟁까지 불사한 반제반봉건 여성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1945년 해방이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식민지 반봉건사회의 모순으로 고통당하는 여성대중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여성운동은 다시 반제반봉건 변혁운동의 대열에 서지 않을수 없었다.

미군정기여성운동의 성격 둘째, 미군정기 여성운동은 급진적 여성지식인들의 공허한 구호에 그친것이 아니라 여성대중들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여성운동이 광범위한 여성대중을 조직할수 있었던 것은 여성대중의 이해와 요구에 근거한 여성운동의 방향제시와 당의 정책, 노동조합, 농민조합 등 여타 대중조직의 협조, 여성대중에 대한 교사와 여성운동의 전휘로서 자기역할을 설정한 지식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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