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과거보다, 아직은 ‘나쁜’ 세상이다.

21세기 이전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이 살면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이야, 세상 참 좋아졌다.” 혹은 “세상 참 편해졌다”일 것이다. 기차로만 여섯 시간이 걸리던 서울-부산 여정이 몇 년 후에는 편도 16분만 투자하면 된다는 소식을 들으며, 영화에서만 보던 인공지능 비서가 우리의 지시를 알아듣고 실제로 수행하는 걸 보며 우리는 그 편하고 좋아진 세상에 감탄을 멈추지 못한다.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군사독재와 민주화의 중심에 있던 중·장년 세대와 노년층은 정치적·문화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체감했을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서울 시장 후보가 벽보에 ‘페미니스트’라는 수식어를 내걸고 등장했으며, 젊은 세대는 더는 사회의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고 대자보, 온라인 서명 운동 등 자신들의 의견을 당당히 피력하고 공유한다. 우리에게는 매우 당연한 현상이어도 우리의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이러한 자유가 때로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이야, 세상 참 좋아졌다.”

요즈음, 패스트푸드점을 비롯한 몇몇 음식점은 로비에 무인주문기를 배치해 일정 시간대에는 직원들이 직접 주문을 받지 않는다. 매장 관계자는 인건비도 줄일 수 있고 주문을 제외한 음식 제조 등의 다른 업무에 인력을 투자할 수 있으니 ‘세상이 더 편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며칠 전, 내가 패스트푸드점에 방문했을 때 한 할아버지가 무인주문기를 앞에 두고 쩔쩔매는 광경을 봤다. 할아버지는 결국 카운터로 향했고 다행히 중년 나이대의 점장이 할아버지의 주문을 직접 받아 어려움은 해결됐다. 그때 만약 카운터에 직원이 한 명도 없었다면 할아버지는 뒤돌아 가게를 나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기계를 다루지 못하면 먹고 싶은 음식도 먹을 수 없는 것이 ‘좋아진’ 세상에서 살기 위한 대가인 것일까. 그 세상이 과연 그 할아버지께도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좋아진’ 세상의 오류는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한 남성이 자신의 퀴어성을 밝히며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걸 보고 있던 우리 엄마는 “세상 참 좋아졌다, 저런 것도 텔레비전 나와서 말하고 다니고”라며 무심코 한마디 했다. 하지만 일면식 없는 남녀일지라도 같이 있기만 하면 무턱대고 ‘잘 어울린다.’, ‘사귀어라’라며 입을 모으는 것과 달리,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동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사랑은 ‘저런 것’이 되어버린다. 내 정체성이 스스로에게도 고민거리가 되어 조언을 구하러 나온 그 남성에게도 이 세상은 ‘좋은’ 세상일까.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세상은 ‘좋아진’ 세상일까.

위와 같은 사례들을 모두 나열하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다 적지 못한다. 노인, 성 소수자, 여성, 장애인, 어린이 등 누군가에게는 아직 이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읽는 독자들도,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가 위 사례들의 당사자가 될 수 있으며 이미 당사자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런 것들을 다 신경 쓰다가는 이도 저도 못 할 것이다.”라며 이 사실을 외면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이 뭉뚱그려버리는 ‘그런 것’은 누군가에게는 삶의 일부분이다. 그들의 불편과 상처를 아예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와 그로 인한 차별과 무시는 괘씸죄가 더해진 중죄다. ‘좋아진 세상’이라는 연극을 위해 삭제되거나 희생되어야 하는 배역은 없다. ‘좋아진’ 세상의 오류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좋아졌다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2019년의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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