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 살인용 「첨단기술」보여줘

페르시아만 전쟁-언론은 「걸프전쟁」이라 부르지만, 본질적으로 미국-이라크 전쟁이다-이 끝났다.

전쟁의 역사상 처음으로 전세계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이 전쟁은, 예상(?)대로 약 한달여만에 끝났다.

그리고 심각한 문제를 여럿 제기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최첨단 전자 무기」의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스텔스 폭격기」-레이다망을 피해서 목표물에 접근하여 폭탄을 퍼부어대는 무서운 비행기. 「토마호크 미사일」-아주 낮은 고도를 「스스로의 판단하에」 적절하게 유지하여 목표물에 명중하는 폭탄 등등. 전쟁이 단기간내에 끝나자 주판알을 튕기며 싱글벙글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우선 부시 미국대통령이다.

전세계에 미국의 힘을 다시 한번 과시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운위하는 약한(!) 나라들의 「민족운동」세력의 기를 꺾어놓았고, 「나토」로의 금의환향을 꿈꾸게 되었고 게다가 소련도 별 볼일 없이 변해가는 것 같은 지금, 91%라는 경이적인 국민적 지지가 그를 한없이 기쁘게 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 이름도 으스스한 「무기상인」들이 싱글벙글할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로 전세계적인 평화군축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이미 판매한 무기는 소비(?)가 안된 채 녹슬어가거나 창고에 쌓이고 반전평화 군축운동이 거세게 대두되어 수백억달러의 돈을 들여 개발한 최신전자무기들의 판로가 봉쇄되어 있었다.

페르시아만 전쟁은 그야말로 미국 군수산업체를 「존망의 위기」에서 구출한 「가뭄끝의 단비」였던 것이다.

전 세계에 「생중계」형식으로 광고비도 내지 않는 「최신무기의 텔레비전 광고」가 진행된 데다, 재고품이 드디어 소비되고 있는 광경에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우리에게 엄청난 걱정거리를 안겨주었다.

전자오락에 중독된 아이들은 오락을 즐기는 그 심정 그대로 「인간이 대량 살육되는 전쟁」을 「전자오락 비슷한 것」으로 즐겼다.

불행하게도 오락을 즐기는 아이들은 컴퓨터를 즐기고 숙달된 아이들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현대적 과학기술」을 「환경」으로서 생활속에서 수용하고 있다.

「오락거리로서 최신 전자무기에 대한 선풍적 관심」은 첨단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의 일부인 것이다.

이제 현대의 첨단과학기술의 심각한 문제가 떠오른다.

그것의 중심이 군사과학이라는 점, 그리고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과학」의 이미지가 「컴퓨터」전자과학과 「군사기술공학」이라는 점이다.

이번에 생중계된 「페르시아만 전쟁」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여지없이 들추어냈다.

어른들이라 해서 아이들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기름값 인상」이 걱정거리였을 뿐, 텔레비전 화면에 비쳐지는 「F15」전폭기의 표적 모니터 「+」표시를 전자오락기 보는 심정으로 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과학기술이 본질적으로 나쁜 것일까? 그것을 잘못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지구상의 한 구석에서는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그나마 산사람을 「빨리」죽이려고 수억달러씩 하는 미사일을 소모해야 하는 것일까? 요즈음에는 「과학기술혁명」이라는 주제가 사회과학자들의 논쟁속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과학기술자가 아닌 주로 경제학자 들에게서 제기되는 「과학기술혁명」은 20세기의 비약적인 과학기술 발전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경제적인 생산능력과의 관련하에 제기되고 있다.

곧, 현대 세계의 경제적 생산력 발전의 근원을 추적하는 가운데 개념화되어 사회과학 전반으로까지 확대되어가고 있다.

소련과 동구권의 변화를 「과학기술혁명의 부재로 인한 경제적 생산력의 정체」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문제는 주로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군사과학」중심으로 「과학기술혁명」이 진행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민중의 복리증진에 기여하기보다는 억압, 착취, 예속의 관계를 창출하고, 인류절멸의 대재난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점점 높여가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생산력의 발전이 민중의 복리증진에 기여할 토대가 되고, 그것이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점에서, 어쨌든 과학은가르쳐야 하고 우수한 과학기술자를 양성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과학교육은 무언인가 결여되어 있다.

머리좋은 아이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다.

더욱 문제는 「철학없는 과학」의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점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세계를 탐구하고 인식하는 「인식체계」로서의 「과학」보다는 실용적인 흥미, 기호, 취미를 충족시켜주는 것-즉, 기술공학적인 것-으로 과학의 이미지가 일반화되는 것이다.

과학교과서가 위에서 이야기한 두가지 경향의 과학관을 심는 원천이 되고 있다.

살아있는 자연과의 연관을 상실한 「추상적 지식」이 「과학적 관점」에서 서술되고, 「실험」은 몇가지 실험도구 다루는 법 이상의 기능적인 내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총체적 연관이 상실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고 본래 과학적 지식의 큰 역할인 물질세계에 대한 생생한 이해는 사라진다.

이러한 교과서를 사용하여 「교과서 중심으로」 입시에 대비하는데 중점을 둔 과학교육의 결과는 뻔하다.

과학에 흥미있는 「뛰어난」아이들-장래 과학기술자의 재목-은 추상적 지식을 논리구조적으로 직관하는데 만족하여, 자연 또는 현실세계를 잃어버린 추상적 지식과 논리의 폐쇄회로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식」만 남고 「자연과 현실세계」는 사라진다.

「좌절한」아이들은 「추상」이라는 담을 쌓고 컴퓨터-전자오락을 「과학」으로 열심히 배우게 되거나 과학적 탐구에서 도피해 버린다.

이러한 두 범주의 아이들의 모습이 오늘날 과학기술자의 보편적인 모습이 된다.

고도로 추상화 전문화된 영역속의 과학자와 추상능력을 상실한 기술자의 비극적(!)인 결합속에서 근사과학이 탄생하고, 제국주의-내외 독점자본의 「프로그램」에 따라 민중수탈적인 경제성장이 진행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인류절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자본주의」의 현실을 보다 민중복리적인 전망하에 지양해가는 과제에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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