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면 나는 여자다. 변한 것은 없지만 그 순간부터 여성이 된다. 나를  여성으로 인식하는 데 내게 동의를 구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면 누군가는 스스로 남성이라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혹은 여성을 사랑한다고 짐작한다. 사람들은 꽤 자주, 어느 것도 아닌 존재가 있음을 잊어버린다.

세상이 바뀌면서 퀴어의 목소리가 모였고 여러 담론을 형성했다. 이제 동성애는 미디어에서 흔히 등장하는 소재이고, 때로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사랑받는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성 지향성/정체성이 트렌드가 된 상황에 대한 문제점은 우선 차치하고 그 와중에도 지워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에이젠더와 에이섹슈얼들이다.

에이젠더는 사회 구조 내에 존재하는 젠더를 거부하는 성 정체성이다. 이분법적인 여성과 남성 젠더 중 어느 것도 아니다. 회원가입을 하거나 이력서를 낼 때 에이젠더들은 여성과 남성 중 하나에 자신을 욱여넣어야 한다. 남들은 이들의 신체를 기준 삼아 마음대로 정체성을 결정한다. 이러한 상황을 폭력이라고 부르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에이섹슈얼들은 대강 뭉뚱그려 무성애자라고 불리고 있지만 아주 다양하기에 발언이 조심스럽다. 그래도 말을 꺼내는 건 사랑이 넘치는 세상에 무성애자인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저는 무성애자입니다/에이젠더입니다.”라는 말에 따라오는 반응은 “그런 건 없다.”는 식이다. 때로는 거짓말이나 애인을 사귀지 못한 인간의 자기 위로 정도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인간”인 내가 여기에 있고 나와는 또 다른 무수한 무성애자가 있다.

무성애를 거짓말이나 변명 따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화를 내기도 한다. “차라리 내가 싫다고 하라”지만 나는 그 친구가 좋았다. “너 호모포비아구나?”라며 원망을 산 무성애자가 단지 인간과 사귈 수 없을 뿐이었던 것처럼. 반대로 에이(섹슈얼)라더니 왜 연애를 하냐며 따져 묻기도 한다. 무성애라는 허상을 깨트린 영웅마냥 당당하게.

지워지는 세계는 살아남기 위해서 변명을 준비한다. 사랑 넘치는 사회의 언어로 비(非)사랑을 설명해보자. 당신과 만나느니 케이크를 먹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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