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산다]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나만의 알라딘 램프
[읽어야 산다]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나만의 알라딘 램프
  • 이정민 중앙일보 논설위원
  • 승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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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경제·87년졸)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정민(경제·87년졸) 중앙일보 논설위원

어릴 적 나는 지독한 책벌레는 아니었지만 유독 「아라비안나이트」는 읽고 또 읽었다.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램프를 슥슥 문지르며 주문을 외면 램프의 요정이 튀어나와 “주인님, 소원 세 가지를 말씀하시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라며 마법을 부리는 장면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 알라딘 램프를 하나쯤 갖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알라딘’은 어릴 적 ‘알라딘 램프’의 기억을 소환해 냈다. 

기자 30년. 지치고 무너지고 쓰러지려 할 때마다 나를 버티게 해준 것, 그래서 조금이나마 성찰적 시간을 갖게 해준 힘은 책읽기에 있었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소망했던 ‘알라딘 램프’가 책 속에 있었던 거였다. 

어떤 사람들은 기자를 사색적 글쓰기를 하는 꽤 고상한 직업으로 여긴다. 하지만 취재원과 만나고 새로운 뉴스거리를 발굴하는 데, 시쳇말로 ‘몸 쓰는 일’에 훨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극한 직업이다. 올 들어 주 52시간 근로제가 언론사에도 적용돼 기자들의 생활도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내가 일선 취재기자로 뛸 때는 정말 밤낮이 따로 없었다. 

그 중 정치부는 가장 혹독한 부서다. 기자 7년차이던 1996년부터 정치부 취재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가택(家宅)정치’가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대선 주자나 당 대표·원내대표·사무총장 같은 유력 정치인들은 전담 취재기자가 배정돼 있어서, 이른 아침과 밤늦은 시간까지 자택을 출입하며 취재하는 게 관행이었다. 대개 하루 일과가 이렇다. 오전 6시쯤 집에서 출발→취재원 자택으로 직행, 아침 식사→국회 혹은 당사로 출근→취재 및 기사 작성→취재원 등과 저녁 회동→기사 최종마감(밤 11시~새벽1시)→퇴근(밤 12시~새벽2시).

취재하고 기사 쓰고 야근하고…. 컨베이어 벨트 돌리듯 이 과정은 무수히 반복됐다. ‘워라밸’이 간절했지만 그땐 그런 용어조차 없을 때였다. 대신 나는 가방 한 구석에 읽고 싶은 책을 넣어 갖고 다니는 ‘사치’를 부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덕분에 가방은 늘 무거웠지만 말이다. 어쩌다 점심 약속이 펑크나는 날이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동료들 사이를 몰래 빠져나와 ‘혼밥’을 하며 허기진 배를 채우듯 책장을 넘기곤 했는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짜릿한 희열과 위안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가 인도하는 신비한 세상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던 셈이다.

그 황홀한 여정에서 숱한 걸출한 위인들을 만났다. 직업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들의 경험과 일생은 내겐 멘토이자 스승이 돼줬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역시 그런 경우다. 곁에 두고 가끔씩 손 가는 대로 펼쳐 읽곤 하는데, 두고두고 곱씹어 사색할 거리를 제공해준다.(물론 기자라는 직업상 관련성과 호기심이 크게 작용한 측면도 크다.)

밀은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아버지 제임스 밀에 의해 영재 교육을 받은 ‘엄친아’였다. “한 번도 크리켓 놀이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으며, 세살 때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몇 년 뒤엔 라틴어, 유클리드 기하학, 대수학을 배워 동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뛰어났다. 특히 아버지와 교분 덕분에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과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리카르도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평생을 사회개혁을 위한 글쓰기에 전념했다.

「자유론」이 출판된 것은 100년도 훨씬 전(1859년)이다. 하지만 당시 영국·유럽의 논쟁들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문제, 사회 개혁을 둘러싼 논쟁과 너무나 흡사해 사색과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주곤 한다. 밀의 사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으나,나는 그가 ‘열린 사고’와 ‘경험과 토론’을 통한 검증을 강조한 점에 끌렸다.

무오류라는 착각과 독단을 가장 경계했던 밀은 「자유론」에서 이렇게 썼다. “편협하기로 유명한 로마 가톨릭 교회조차 새로운 성자를 세우는 시성식에서는 ‘악마의 대변자’가 하는 말을 인정하고 참을성 있게 듣는다. 그(악마)가 하는 모든 말을 다 들어보고 평가해보기 전엔 성인이라는 사후의 영예는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멋진 말 아닌가.

이정민 중앙일보 논설위원 

 

*본교 경제학과를 1987년 졸업했다. 1988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이후 경제부, 정치부를 거쳐 32년째 기자로 재직 중이다. 메이저 신문사 중 여성 기자로서는 최초로 2017년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앞서 JTBC 정치부장, 중앙일보 정치부장, 중앙SUNDAY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2017년부터 1년간 제10대 이화언론인클럽 회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정치, 국제, 외교안보 분야 논설위원으로 중앙일보 칼럼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