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연(緣)] 이름 없는 강박증 환자들이 만드는 세상
[이화:연(緣)] 이름 없는 강박증 환자들이 만드는 세상
  • 이대학보
  • 승인 2019.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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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요구하는 '완성'의 기준 높아
대학시절부터 키운 디테일에 대한 훈련
 
윤미로(독문·09년졸)엔씨소프트 브랜드커뮤니케이션실
윤미로(독문·09년졸)
엔씨소프트 브랜드커뮤니케이션실

나에겐 이상한 버릇이 있다. 일을 하기 위해 엑셀 파일을 열면 행 높이는 16.5로, 폰트는 맑은 고딕으로, 글자 크기는 10으로 양식부터 맞춘다. 표를 그릴 때는 언제나 첫 행의 음영색을 ‘흰색, 배경 1, 5% 더 어둡게’로 통일한다.

그뿐 아니다. 파일의 저장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모든 시트의 화면 비율을 100%로 돌려놓고, 마우스 커서는 반드시 A1 셀에 올려 둬야 한다. 아무리 시트 탭의 개수가 많더라도 말이다.

내게는 엑셀 시트의 양식을 보기 좋게 정리하고, 나름의 문서 규칙을 정해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다. 손가락 마디마디 미세혈관 끝까지 에너지를 모아 최선을 다했다는 묘한 만족감을 주는 행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망망한 성벽의 한 귀퉁이에서, 회반죽을 파르르 얇게 펴 바르고 한쪽 눈을 가늘게 떠가며 조심조심 수평을 맞춰 쌓아 올린 벽돌 하나를 바라볼 때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떠오르는 웃음 같은 것이다.

자기만족에 가까운 이 같은 ‘강박 행위’를 나 혼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하다 보면 각자가 지닌 은밀한 강박들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공통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면 전부 다 같이 미간을 잔뜩 모으고 ‘벽돌 한 장’에 매달리기도 한다.

회사의 공식 소셜 채널을 운영하는 우리 팀은 지난 6월 말 블로그 리뉴얼 프로젝트로 바쁘고 고된 시간을 보냈다.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버그를 잡고, 성에 차지 않는 디자인을 뜯어고치고, 1500건이 넘는 포스팅을 일일이 검수하느라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론칭일까지 이틀 남았던 어느 날 저녁, 팀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블로그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던 배너 이미지가 살짝 별로인 것이다. 점수로 치자면 97점 정도. 이제 와서 뒤집자니 서른 건이 넘는 이미지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 밤샘 작업은 덤이었다.

완벽을 추구할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우리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래, 도자기 깨자! 깨버리고 다시 만들자. 겨우 이렇게 오픈하려고 지금까지 고생한 건 아니잖아.”하고 각자의 마음 속 ‘강박’을 선택했다.

돌이켜보면 이런 디테일에 대한 훈련은 대학 시절부터 키워져온 듯하다. 난생 처음 리포트라는 것을 쓰면서 참고 문헌의 저자명, 번역자명, 출판사, 출판연도 등을 기입하기 위해 마치 헌법 조항을 살피듯 인터넷을 뒤져가며 복잡한 작성 규칙을 익혔던 기억이 난다.

학보사 활동을 했을 때는 FCD(Fact Checking Desk)라는 업무도 맡았는데, 기사 한 문장 한 문장을 검토하며 사실을 왜곡하거나 오기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매주 편집일이 돌아오면 세 시간이 넘도록 전화기를 붙잡고 인터뷰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맞느냐’ 물어봤던 것이 생생하다.

사회에 나와 보니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홍보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 고객사의 뉴스레터를 제작해 보고했는데, 잘못된 ◆CI가 들어갔다며 눈물이 쏙 빠지게 지적을 당한 적이 있다. 로고의 색상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육안으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차이였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억울할 정도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완성’의 기준은 너무 높았다.

평소에 가끔, 정신이 홀린 것처럼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밤 10시를 훌쩍 넘길 때가 있다. 어느 날은 나 홀로 남은 어둑어둑한 사무실에서 집에 가려 짐을 챙기다가 문득 밀려온 서러움에 남몰래 훌쩍였다.

대체 이걸 누가 알아준다고 이 시간까지 남아 고생을 할까. 하이픈(-)을 콜론(:)으로 잘못 넣든, 이미지가 중앙에서 1픽셀 벗어나든, ‘창조’를 ‘창의’로 바꿔 쓰든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텐데. 설령 내 눈에만 보이는 작은 티끌들을 바로잡아 더 멋진 결과물이 탄생한들, 나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다 텅 빈 사무실에서 갑자기 소리 내어 말하고 싶어졌다. 여기 담긴 수백 수천만의 글자들 중 내 이름 석 자 들어가 있지 않지만, 누가 뭐래도 이건 내 작품이라고. 아무도 볼 수 없는 곳까지 조심조심 매만져가며 애정을 쏟아 부은 내 새끼라고. 이토록 멋진 제품과 서비스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름 없는 수천수만 명의 인내와 자부심과 끝없는 강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닿는 보도블록 하나, 지하철 플랫폼에 붙은 광고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이것을 만든 누군가에게는 0.1cm의 오차가, 누군가에게는 띄어쓰기 한 칸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나만의 기준이고 자존심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고집을 한껏 부린 끝에 참 잘 만들었다, 하며 빙그레 웃음 지을 사람들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누리고 즐기는 이 세상은 이름 없는 수많은 ‘강박증 환자’들의 고민과 애정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이, 또 내가 참 안쓰럽고도 자랑스럽다.

◆CI : Corporate Identity. 기업의 사회에 대한 사명, 역할, 비전 등을 분명히 해 기업 이미지나 행동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 역할을 한다.

윤미로(독문·09년졸)

 

*기존의 ‘직장인칼럼’을 ‘이화:연(緣)’으로 이름을 바꿔 연재합니다. 이화 정체성을 바탕으로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졸업생들이 직접 건네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화:연(緣)은 격주로 인터넷이대학보에 미리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