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물권을 이해 못 하겠어.”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말이었다. 이유인즉슨, 누구나 언제든 될 수 있는 ‘장애인’과는 다르게, 자신이 동물이 될 수는 없어서 공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지금 인권도 다 안 지켜지는 마당에 무슨 동물권을 논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자신은 동물도 존엄한 줄 모르겠지만 인간도 존엄한 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는 생각했다. ‘저 아이에게 뇌 같은 건 없는 걸까?’ 그리고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게. 생명은 왜 존엄하지?’ 초등학생 때, 마치 세뇌 당하듯이 들은 ‘모든 생명은 존엄하고 모든 인간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에 의문이 들었다. 인간의, 나아가 모든 생명의 생득적인 존엄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사실상 지구상, 우주상의 모든 생명체는 아무 의도 없이 던져진 존재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생명의 존엄함은 순전히 인간의 ‘뇌피셜’인데, 이는 왜 이렇게 절대적으로 받들어지고 있는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 인간 존엄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고대 그리스 시대만 해도 인간의 생득적인 존엄함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시대의 존엄은 명예, 지위, 탁월함 등과 호환되는 말이었고, 결국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 계층만이 점유했던 덕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부의 인간들만 가지고 있다고 받아들여졌던 존엄이 인간 전체에 확대된 것은 중세 시대가 도래한 후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그 이유는 신 때문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존엄성을 주었고,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근대에는 인간 존엄의 근거가 인간 내부로 향하게 된다. 칸트는 그 근거가 인간만이 가진 이성, 도덕적 자율성 때문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성과 지성의 발달로 인한 참혹한 전쟁을 겪고 나자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누구나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이유로 뒷받침하게 되었다. 이렇듯 인간의 존엄이 존중받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사실상 인간 안에 존엄을 발생시키는 생득적이고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태어나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해 수단적으로 생성해낸 개념이 바로 존엄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인 존엄을 지켜줘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 역사를 되짚어 오며 보았듯이, 인류는 그간 타자의 존엄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구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왔다. 고문, 전쟁, 학대, 노예제, 전체주의, 산업화 등 역사 속 수많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타자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았던 해결책들은 비참하리만치 끔찍한 최후로 우리를 이끌었다. 많은 인간이 죽고, 다치고, 트라우마를 겪었으며 인간이 아닌 동물과 자연은 설 자리를 잃고 멸종 위기와 환경오염에 허덕이고 있다. 인간의 해결책은 실패했다.

생명의 존엄함은 인간이 수단적으로 만들어낸 개념, 즉 ‘뇌피셜’이 맞다. 그러나 그동안 타자의 존엄을 존중하지 않아 발생한 수많은 문제와 실패를 경험적으로 되짚어볼 때, 존엄의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인간은 이제 타자의 존엄을 존중하고 공존할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그러니 자연, 동물, 인간의 존엄함을 모르겠다는 내 친구에게 해줄 말은 딱 하나다.

그동안 뭘 봤니?

윤유성 (커미·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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