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눈 밝을 때 읽어라
[읽어야 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눈 밝을 때 읽어라
  • 김찬주 물리학과 교수
  • 승인 201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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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주 교수(물리학과). 제공=본인
김찬주 교수(물리학과)

모태 귀차니스트이자 결정장애자인 나 같은 인간은 그저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기를 바란다. 뇌에서 감정이나 선택을 담당하는 부분이 아침부터 밤까지 흥분하지 않고 바닥 상태에만 머물러있기를. 특별히 정신을 집중하거나 판단해야 할 일이 없기를.

이렇다 보니 지옥이라는 중고생 시절도 나는 그럭저럭 잘 버텼다. 무미건조한 삶의 연속이었지만, 가끔 머릿속을 쥐어 짜내야 해서 마음의 평정이 흐트러지는 때도 있었다. 아주 사소하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도 있다. 중학교 신입생 때 학생 카드에 취미를 쓰는 칸이 있었다. 취미라니? 먹고 공부하고 놀고 잠자는 것 말고 뭘 더 해? 아무리 생각해도 내세울 취미가 없어 그냥 제출했다. 나중에 보니 선생님이 빈칸을 독서로 채워 넣으셨다. 그 뒤 내 설문 작성용 취미는 독서가 되었다. 독서가 취미라고 쓸 때마다 가슴 한쪽이 약간 찔리긴 했지만, 끙끙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대학생이 된 형이 방학 때 집에 내려와 모 출판사에서 펴내기 시작한 추리문고를 보여줬다. 홈즈나 뤼팽만 알던 나에게 퀸이나 크리스티는 신세계였다. 중1 때 벌써 살인(!)에 눈을 뜬 나는 전주의 서점을 샅샅이 뒤져 몇 권을 더 찾아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에게 생소한 추리소설은 지방에서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중학교 내내 틈만 나면 서점을 순례했다.

어느 날, 한 서점의 일반 소설 문고 진열대를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계 최고의 추리소설이라는 ‘Y의 비극’이 일반 소설 문고에 숨어있었다. 게다가 책값이 190원. 추리소설 문고로 표지만 바뀌어나온 것은 무려 690원인데! 심호흡을 크게 하고, 이게 바로 그 똑같은 책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한 뒤, 잘못(?)이 발각될까 두근두근하며 계산대에 책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집으로 뛰어갔다.

대학은 사당동 고모님 댁에서 다녔다. 언제부턴가 일요일에는 다른 약속이 없으면 그냥 서점에 갔다. 마침 지하철 2호선이 모두 개통되어 광화문까지 가기도 쉬웠다. 아침을 먹고 교보문고에 갔다가 오후에는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에서 시간을 보냈다. 

늘 같은 곳을 다니다 보니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역까지 이렇게 가면 몇 걸음, 저렇게 가면 몇 걸음, 이 칸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구는 저기. 한 출구는 가깝지만 신호등이 있고, 다른 출구는 조금 더 걷지만 신호등이 없다. 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여기서 저기까지는 이 속도로 걸어가야 신호등에서 걸리지 않는다 등등. 이렇게 한 번 최적화를 한 뒤에는 뇌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매주 기계적으로 서점에 갔다.

서점은 늘 새로운 놀이터였다. 혼자여도, 온종일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우선 신간 잡지를 훑은 뒤 온갖 서가를 돌아다니며 내키는 대로 책을 뽑았다. 종착지는 물리와 수학 원서 서가. 새로 들어온 책을 발견하면 기쁘면서도 괴로웠다. 살지 말지 결정을 못 해 몇 달을 계속 들춰보다가 결국 대부분은 집으로 모셔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슬픈 일은 책 보기가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지만, 거짓말이다. 눈은 진실을 알고 있다. 안경을 써도, 안경을 벗어도, 거리가 가까워도, 거리가 멀어도, 조명이 어두워도, 조명이 밝아도, 책의 글자가 망막에 맺히는 상은 예전처럼 자연스럽지 못하다. SNS에 떠도는 물리학자들 얘기로는 최근 번역 완료된 류츠신의 ‘삼체’ 3부작이 그렇게 재미있다는데, 나는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이젠 예전보다 시간이 두 배는 더 들기 때문이다.

나의 최근 연구 주제는 웜홀이다. 어떤 웜홀은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맞는지는 아직 모른다. 만약 가능하다면, 나는 과거의 나에게 무조건 더 많이 읽으라고 할 것이다.

귀차니스트에게도 종말이 있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은 오늘과 다르다. 읽고 싶어도 마음대로 읽지 못하는 때가 도둑처럼 오리니, 읽을 수 있을 때 읽어라.

김찬주 교수(물리학과)

 

*입자물리학 이론 전공.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 한국물리학회의 백천물리학상을 수상하고 현재까지 논문 50여 편을 SCI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의 ‘현대물리학과 인간사고의 변혁’ 강의는 2015년과 2018년 케이무크(K-MOOC) 학습자 만족도 1위 강좌, 2012년엔 한국교육개발원 등이 기획한 ‘대학 100대 좋은 강의’로 뽑혔다. 작년 본교 강의우수교원으로 선정됐고 현재 기획처부처장(평가)을 역임 중이다. 저서로 「어느 물리학자의 세상 보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