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드라마 속 가난한 주인공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밝고 씩씩한 얼굴이다. 월세가 밀려서 집에서 쫓겨나고 일자리가 사라져 수중에 돈이 없어도 마치 만화에 등장하는 캔디처럼 자신 앞에 닥친 가난이라는 고난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충분히 무찌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성취를 이룬 내용의 영화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장애를 갖고 있는 주인공은 장애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위기와 좌절을 극복하고 결국엔 성취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사람들은 이렇게 콘텐츠에 재현된 모습을 보곤 감명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친다.

 

그렇지만 정말 가난이, 장애가 이런 모습일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난은 사람을 치졸하고 구차하게 만든다. 기회를 빼앗고 목을 옥죄는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장애 역시 마찬가지다. 위기와 좌절을 극복하기 보단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차별받고 쉽게 내뱉는 혐오 표현에 상처받곤 한다. 콘텐츠에서 재현되는 모습과는 다른, 현실에 가까운 모습이다.

 

사회 내부에서 소수 약자의 위치를 점하는 집단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자의 언어를 하고 있는 지배적인 가치관과 생활방식에 의해 규정지어진다. 소수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스스로 내뱉는 외침은 쉽게 무시당하고 지워질 뿐이다.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조차 주류사회의 관점에 의해 말해지고 일컬어진다. 특히 콘텐츠에서 재현되는 소수자는 더욱 그렇다. 콘텐츠 속에서 소수자들은 이토록 쉽게 낭만화되고 타자화된다. 여성, 빈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성소수자 역시 주류 사회의 관점에 의해 그려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 뮤직비디오에선 성소수자가 힘듦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들을 무지갯빛 하늘 아래서 희망과 꿈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표현하며 마냥 밝은 모습만을 그린다. 하지만 현실은 노래 가사와 뮤직비디오 내용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사회적 약자에 위치한 성소수자 집단은 여전히 차별과 혐오 속에 살아가고 있다. 지난 6월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됐던 서울광장 반대편에는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시위 역시 함께 개최됐다. 성소수자 ‘반대’ 세력이 들고 있는 피켓들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문구로 가득했다. 지난 대선 토론회에서는 후보자가 다른 후보자에게 ‘동성애에 반대하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마치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듯 말이다. 성소수자가 처해있는 현 사회의 현실의 모습이 이렇다. 콘텐츠에서 재현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모습보단,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며 차별과 혐오로 점철된 언어로 힘들어하는 모습이 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콘텐츠에서 사회적 소수자를 다루면서 사회적 소수자를 가시화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라고 보는 의견 역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소수자가 처한 차별과 혐오를 숨기게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차별을 겪는 상황에 놓인 소수자를 역경을 극복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은 실제 현실과 괴리가 있는 왜곡된 모습이다. 온전히 강자의 시선에서 낭만화된 소수자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콘텐츠에서 소수자 집단을 재현할 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강자의 입장에서 표현되는 소수자는 그들 목소리를 잃고 강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모습으로만 재현된다. 당장 세상이 뒤집히고 세계가 뒤바뀌어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소수자를 재현함에 있어서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는 있을 것이다. 소수자는 앞으로도 현존할 것이기에 이러한 차별에 상처받는 사람이 줄어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소수자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소수자가 스스로에 대해 직접 얘기하는 것을 듣는 것이다. 소수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무슨 어조를 갖고 있는지 드러날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들을 준비가 되어야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그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를 만들고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강자의 언어로 표현된 소수자보다, 소수자가 내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