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과·동양화과·서양화과·섬예과 4명의 학생들을 만나다

오전2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도 조형예술관(조형관) 작업실은 밝게 빛나고 있다. 조형예술대학 연례행사인 MAYDAY 展(메이전)을 앞두고 학생들은 마지막까지 작품에 열정을 쏟아낸다. 작품 구상부터 전시가 이뤄지기까지, 전시를 앞둔 하루 전 야간작업(야작)에 열중하던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체 조형물에 빗대어 결핍 상태의 두 존재의 결합을 표현한 정희정씨의 ‘나, 너 그리고 우리’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인체 조형물에 빗대어 결핍 상태의 두 존재의 결합을 표현한 정희정씨의 ‘나, 너 그리고 우리’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다른 나의 형상을 만들다

조형관A동 1층 입구로 들어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두 사람이 서로 안고 있는 작품이 보인다. 바로 정희정(조소·17)씨의 ‘나, 너 그리고 우리’다. 다리가 한 쪽씩 없는 두 사람이 서로에 기댄 채 껴안고 있는 형상이 눈길을 끈다. 두 나체의 살이 맞닿은 부분에서 피어나는 붉은 색은 보는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얼핏 보면 자음 ‘ㅅ’과 닮은 이 작품은 사실 사람 인(人)에서 영감을 받았다. 정씨는 “인간은 누구나 결점이 있고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며 “결핍 상태의 두 존재가 서로 의지함으로써 온전한 존재가 되고 그로 인해 생기는 온기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작품 옆엔 그의 또 다른 작품 ‘심연’도 있다. 공중에 매달린 여러 철판 조각들과 빛을 반사하는 강철의 독특한 표면은 지나가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정씨는 작품을 통해 일렁이는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감정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며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파도처럼 의미 없이 표류하고 있는 감정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전했다. 

처음 메이전에 참여하는 그에게 작품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시를 앞둔 일주일은 매일 오전4시까지 작업하다 학생문화관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것 역시 힘든 일이었다. 정씨는 “한 교실에 20명이 넘는 학생들이 큰 작업을 하다 보니 초반에는 작업 자리를 정하는 데에도 갈등을 겪었다”고 했다. 작업 도중 위험한 일도 많았다. 한번은 면장갑 낀 손을 잠시 철판 위에 올렸다 뗐는데 한 쪽이 다 타버려 없어졌다. 

오랜 시간 작업에 몰두했던 만큼 아쉬움도 남았다. 정씨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 작품을 만들어도 관람객들은 1분이면 많이 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시간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씨는 “작품을 통해 사람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만큼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작품들은 ‘나 자신’ 그 자체다. 정씨는 “또 다른 내가 전시장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를 보여주는 거고, 누군가가 나를 바라봐준다는 시선 그 자체가 감동”이라고 했다. 덧붙여 만약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메이전에 다시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작가가 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에요. 학생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작가로서 전시에 임할 수 있었고 교수님들께서 선배 작가로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셨어요. 동기들과 같이 작업하며 동기애를 넘어서 전우애도 생기고요.(웃음)”

자극과 적응, 두 감정에 젖어드는 것을 보랏빛 동양화폭에 담은 김예은씨의 ‘환(環)’ 이다현 인턴기자 9421d@ewhain.net
자극과 적응, 두 감정에 젖어드는 것을 보랏빛 동양화폭에 담은 김예은씨의 ‘환(環)’ 이다현 인턴기자 9421d@ewhain.net

붓으로 감정의 고리를 그리다

조형관A동 2층으로 올라가면 벽면에 수놓아진 동양화과 학생들의 작품을 마주할 수 있다. 작품들을 감상하던 세 명의 관람객이 한 작품 앞에 멈춰 섰다. 그들의 눈길이 쏠린 곳에는 보라색이 두드러지는 김예은(동양화·17)씨의 작품 ‘환(環)’이 있다. 작품 속 그려진 문은 묘한 호기심마저 불러일으킨다.

김씨는 유럽여행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극적이고 새로운 감정들이 시간이 지나 익숙해져 버렸다”며 “자극과 적응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고 말했다. 신선한 감정은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감정들은 또다시 새로운 자극을 찾는 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감정들이 지속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며 “그런 세계에 대한 소망을 문을 통해 표현했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표현하고 싶은 주제를 이미지화하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는 답답할 때마다 일기를 쓰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건넨 일기장에는 고민의 흔적이 가득했다. 소소한 감정에서부터 작품에 대한 이야기까지 빼곡하게 채워진 일기장이 약 3달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제가 뭘 표현하고 싶은지 생각하다 보니 제 존재에 대한 원초적인 고민까지 할 수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 학기는 제게 너무 소중하죠.”

메이전 준비 기간 동안 계속되는 야작으로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좌식의자에 기대어 자는 동기들도 있었다. 피곤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동기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야작 때마다 시켜먹는 야식도 쏠쏠한 재미였다. 김씨는 “이제 서로 비밀이 없을 정도로 돈독해졌다”며 “안 친했던 친구들과 많이 친해졌다”고 했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듣고 싶고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이 있다. ‘이거 진짜 예은이 그림 같아.’ 그는 자신만의 색을 가진 그림, 다른 것과 차별화된 그림임을 얘기해주는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작품을 통해 편안함을 주고 싶어요. 누가 봐도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저만의 특색이라 할 수 있죠.(웃음)”

김씨의 작품 ‘환(環)’은 관람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에게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감정이 유지된 경험이 있나요?”

‘놀이터’라는 공간의 화려한 외양과 대비되는 공허감을 표현한 우수민씨의 ‘놀이_空터’의 일부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놀이터’라는 공간의 화려한 외양과 대비되는 공허감을 표현한 우수민씨의 ‘놀이_空터’의 일부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유화에 사라진 동심을 담다

3층의 한쪽 벽에 홀로 걸린 작품은 우수민(서양화·17)씨의 ‘놀이_空터’다. 알록달록한 색채와 섬세함이 돋보이는 ‘놀이_空터’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놀이터들이 담겨 있지만, 그 안에서 단 한 명의 사람조차도 발견할 수 없다. 

우씨는 어느 날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놀이터에 공허함을 느껴 작품을 그리게 됐다. “어릴 적 학교가 끝나고 모래 놀이터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놀다 해 질 녘 따뜻한 저녁밥을 먹기 위해 삼삼오오 집으로 향하던 추억은 대부분 사람에게 있을 거예요. 그 추억을 함께한 놀이터는 지금 화려한 색의 고무가 깔려있지만 때 타지 않은 채 비어있어요.” 

그에게 놀이터는 ‘동심’의 대명사였다. 우씨는 “어릴 적엔 놀이터에서 추억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것 같다”며 “놀이터는 화려하지만 부재한 동심의 모순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전시가 가까워졌을 때 그는 하루 평균 약 6시간 이상을 그림 그리는데 투자했다. 작업의 마무리 단계쯤에는 오전4~5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쪽잠을 잤다. 다음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업을 들으러 가곤 했다. 

우씨가 작품을 그리면서 가장 생각났던 사람은 바로 사촌 동생이었다. 사촌 동생이 그와는 너무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씨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버거운 삶을 살고 있다”며 “수학, 미술, 영어, 논술, 음악, 운동 심지어 웅변학원까지 다니며 놀 시간 없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약 3달의 기간 동안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다. 평소 섬세한 작업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어려운 작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림을 한 장 한 장 그려야 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도 함께 출품해 작업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하지만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견뎌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버팀의 흔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씨는 함께 야작을 했던 동기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잠이 많은 편인 우씨가 그림을 그리다 잠들면 동기들이 그를 깨워줬다. “그 덕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며 “서로 작품에 대해 얘기하고 힘이 돼주며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병 형태의 면직 조형물에 기억하고 싶은 꿈을 11개의 담아낸 김영서씨의 ‘몽(夢)’ 중 일부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병 형태의 면직 조형물에 기억하고 싶은 꿈을 11개의 담아낸 김영서씨의 ‘몽(夢)’ 중 일부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꿈의 조각을 면과 실로 풀어내다

조형관A동 4층에는 섬유예술과 학생들의 개성이 담긴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중 김영서(섬예·17)씨의 작품 ‘몽(夢)’은 섬유가 아닌 도자기 같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면을 조각조각 자른 후 붙여 만든 병들에는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호랑이 자수가 새겨져 있다. 

김씨의 작품에는 개인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김씨는 “지금까지 꾼 꿈 중 가장 의미 있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꿈은 호랑이에게 쫓기는 꿈”이라며 “기억하고 싶은 마음을 병이란 물체에 담아냈다”고 했다.

그에게 꿈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꿈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도 잘 모르고 싫어하는 것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꿈에서 풍겨오는 비현실적인 분위기 속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감각과 감정에 흥미를 느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11개 병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였지만,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김씨는 비교적 길었던 작품 준비 과정 탓에 작업할 시간이 부족했다. “표현 방법에 대해 많이 연구하지 못해 아쉽다”며 “메이전에 다시 참여한다면 해보지 않은 기법을 이용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야작에 몸도 정신도 조금씩 지쳐갔다. 짧은 기간 동안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겨 여유로운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다. 김씨는 “끝나면 다른 무언가를 하기 보단 그냥 쉬고 싶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준비하느라 수고 많았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메이전을 함께한 동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다들 수고했고 전시가 마무리된 만큼 푹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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