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외 약 130편의 동화를 집필한 임정진 작가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외 약 130편의 동화를 집필한 임정진 작가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전자부품을 파는 칙칙한 가게들을 지나면 유난히 환한 공간에 자연스레 발길이 멈춘다. 아기자기한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인형과 그림책이 가득해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어른에게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어린이에게는 약 130권의 동화로 이름을 알린 임정진 작가(국문·85년졸)를 20일 그의 작업장에서 만났다.

“동화 작가는 철들면 끝장이에요. 어린이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동화를 쓸 수 있으니까요. 어린이 책 업계 사람들은 대부분 순하고 철이 덜 들었어요. 치열한 사회에서 벗어나 동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것도 행복이죠.”

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선 일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임 작가는 1992년 「말더듬이 뿌뿌」를 시작으로 5일 「빵 더하기 빵 더하기 빵빵빵!」까지 출판하며 약 30년의 세월 동안 동화 약 130권을 집필했다. 말 그대로 다작 작가인 그는 57살인 지금까지도 아이의 눈높이로 꾸준히 책을 쓴다.

임 작가는 57살의 나이에도 동심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끊임없는 관찰을 꼽았다. 사회가 빠르게 바뀌는 것처럼 아이들도 변하기 때문에 이들의 삶을 관찰하며 요즘 ‘동심’이 무엇인지 파악한다는 의미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직접 묻기도 하고, 자신의 책을 읽고 보낸 편지를 참고하기도 한다. 

“나이로는 아이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동심을 놓치지 않으려는 편이에요. 「천방지축 개구리의 세상 구경」을 읽은 어린이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개구리가 농구 선수를 뽑는 오디션을 보면서 자신보다 큰 농구공에 맞고 기절하는 장면이 가장 재밌다더라고요. 저는 그 장면이 웃길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어요. 요즘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죠.” 

그가 처음부터 동화 작가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월간 주니어 기자, MBC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 작가로 활동하다 크라운 제과에서 카피라이터 일을 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부딪혔다. “아이 돌봐주는 사람을 고용하려니 제 월급을 다 줘야 하는 거예요. 번 돈을 다 주면 회사를 왜 다니겠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돌봤죠.”

그는 아이를 키우던 중 한 영화기획자로부터 청소년 영화 시나리오를 소설로 써보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보름 만에 원고 700매를 써오라는 무리한 요구였지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덥석 수락했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1980년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다. 이후 임 작가는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등의 청소년 소설을 집필해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청소년 소설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그에게 작품을 맡기는 출판사는 점점 줄었다. 위기감을 느끼던 그에게 대교출판사의 편집장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동화 작가’는 어떠냐는 것이었다. 1988년 계몽사 아동문학상을 수상한 경험이 있어 동화에 관심이 있었기에 그는 곧장 동화 「말더듬이 뿌뿌」를 써냈다. 그렇게 ‘얼떨결에’ 동화 작가가 됐다. 

“얼떨결에 동화작가가 됐다는 말이 딱 맞아요. 보통 다른 작가들의 경우 많은 연습 끝에 책을 써내는데 저는 작가가 된 후 실전에서 동화 쓰기를 배웠죠. 그래도 계속 제게 책을 써달라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다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양에서 질이 나온다’고 믿는 그는 동화 작가가 된 후 쉬지 않고 책을 집필했다. 작업실을 갖추고 규칙적인 시간을 정해 작업하는 다른 작가와 달리 임 작가는 집에서 시간이 되는대로 글을 썼다. 아이를 돌봐야 해 늘 바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제 아이에게 ‘동화 작가인 엄마가 재미있는 동화 많이 들려주냐’고 묻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나요. 애가 있는 여자 작가는 자기가 원하는 스케줄대로 행동할 수가 없어요. 시간이 없으면 밤을 새워 글을 쓰기도 했어요.”

그렇게 써내려간 그의 수많은 동화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삶에 주목한다. 「엄마 따로 아빠 따로」, 「나보다 작은 형」 모두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회 문제를 아이의 시선에서 녹여낸 작품이다. 「엄마 따로 아빠 따로」는 작가의 이혼한 친구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책이다. 「나보다 작은 형」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희귀병에 걸린 형을 가진 동생의 이야기로, 병을 앓는 형이 아니라 그런 형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생의 시점에서 서사가 진행된다. 

“사회 속에 아이들이 있고, 가정 속에 아이들이 있는 거죠. 아이들이 항상 파라다이스에서만 사는 게 아니잖아요. 사회 문제에 다 연관돼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동화를 통해 그런 문제를 하나씩 다루는 거예요.”

그는 동화 작가뿐 아니라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옛이야기와 동화 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임 작가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책을 쓰려는 사람은 많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을 느꼈다. 이 흐트러진 균형을 어떻게 바로잡을까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바로 ‘스토리 텔링’이다. 스토리 텔링은 옛이야기들을 재구성해 홀로 연극하듯 이야기하는 퍼포먼스다. 따라서 임 작가는 전 세계를 돌며 스토리 텔링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한국 DMZ 지역의 이야기를 다룬 「겁쟁이 늑대 칸」을, 인도에서는 한국 옛이야기 「빨간 부채 파란 부채」를 소개했다.

“제주도에는 책방이 100개가 넘지만 책을 사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이 위기를 헤쳐나갈 방법이 스토리 텔링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책은 안 읽지만 이야기는 듣고 싶어 하거든요. 이를 통해 책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 있는 거죠.”

임 작가는 앞으로 스토리 텔러와 동화 작가의 일을 겸하며 ‘살아남는 책’을 쓰고자 한다.

“책 출판 후 5년이 지나면 보통 ‘죽은 책’이 돼요. 아무도 안 찾는 거죠. 저는 50년이 지나도 ‘살아남는 책’을 쓰고 싶어요. 제 책과 함께 독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하양이와 까망이 부릉신에게 묻다」 中

 

하양이는 까망이가 먼저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여보, 나는 사라지고 싶어. 사라지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야. 내가 태워 주었던 이들도 다 사라졌어. 그게 아름다워.”

하양이도 비로소 남편의 말을 이해했다. 까망이는 죽음에 대해 오래 생각했으며 많은 걸 느낀 자동차였다. 그의 결정은 옳은 것이리라 믿었다. 하양이는 조금만 더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 후에 까망이처럼 사라지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하양이는 부릉신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동차도 영혼이 있나요?”

부릉신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물론. 열심히 산 것은 다 영혼이 있어.”

(중략)

하양이는 까망이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뒤돌아 섰다.

까망이는 압축기 아래로 다가갔다.

사라질 차례였다.

그게 순서였다.

- 임정진(국문·85년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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