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넘어 인간으로, 이화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다
‘여성’을 넘어 인간으로, 이화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다
  • 곽태은 기자
  • 승인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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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부터 이화역사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전 ‘이화의 독립운동가들’ 전시가 진행된다. 이화 출신 독립운동가 6인의 이화 재학시절 사진, 농촌계몽운동 모습 등의 활동 사진을 소개하는 본 전시회는 2020년 5월16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21일부터 이화역사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전 ‘이화의 독립운동가들’ 전시가 진행된다. 이화 출신 독립운동가 6인의 이화 재학시절 사진, 농촌계몽운동 모습 등의 활동 사진을 소개하는 본 전시회는 2020년 5월16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신마실라, 이화숙, 홍애시덕, 황애시덕, 신의경, 최선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조국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항일 운동에 헌신했던 이화의 선후배들이 시간을 거슬러 한자리에 모두 모였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자대학 졸업생 신마실라와 이화숙, 그리고 약 20년간 본교 교수로 재직한 최선화에 이르기까지 여섯 명의 이화 출신 독립운동가들이다. 

이화역사관이 21일부터 창립 133주년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특별전시회 ‘이화의 독립운동가들’을 열었다. 그동안 남성 위주로 다뤄졌던 독립운동가들에게서 한 발짝 벗어나,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당당히 이화의 긍지와 기개를 떨쳤던 여섯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특별전시회가 열린 기획전시실 내에는 6명의 이화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설명한 판넬이 줄지어 서 있다. 그 옆에는 중정의 열린 문 너머로 돌계단이 있는 소박한 안뜰이 보인다. 안뜰을 배경으로 6명의 이화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이름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서양식 학사모와 졸업 가운을 입은 이화학당 대학과 제1회 졸업생이 있다. 신마실라(1892~1965)다. 그의 졸업사진은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나 근대교육을 받은 신여성, 한국 최초의 여자대학 졸업생이 탄생한 순간을 담았다. 

〈더 필라델피아 레코드〉(The Philadelphia Record) 신문에 실린 신마실라의 인터뷰 기사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더 필라델피아 레코드〉(The Philadelphia Record) 신문에 실린 신마실라의 인터뷰 기사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1942년 2월3일 자 신문 <더 필라델피아 레코드>(The Philadelphia Record)에 실린 신마실라에 대한 인터뷰 기사도 눈길을 끈다. 졸업 후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다 미국에서 순회강연을 다니며 독립 자금을 모았던 그가 자동차 손괘사건으로 소송에 휘말렸다는 내용의 기사다. 당시 신마실라는 상대편 변호사가 자신을 일본인으로 대하는 것에 반발했고 이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기사의 ‘I hate Japanese, as do all Koreans for what we suffered(나와 한국인들은 우리가 겪은 고통으로 인해 일본인들을 싫어한다)’라는 구절은 당시 일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신마실라가 전시된 판넬의 맞은편으로 몸을 돌리면, 신마실라와 함께 졸업한 이화숙(1893~1978)이 있다. 신씨와 함께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한 이화숙은 1919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의 국무원 참사로 활약했다. 또 그는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 임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전시 판넬 하측에는 그가 상해 임정에서 활동했던 사진이 있다. 그가 입은 의상이 눈에 띈다. 양복을 입은 남성 3명과 중국 전통 의상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여성 2명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근대 문화 수용을 통해 도탄에 빠진 조국을 새로운 길로 이끌어나가려는 독립운동가들의 의지가 엿보인다.

반대편으로 건너가면 홍애시덕(1892~1975)의 판넬과 황애시덕(1892~1971)의 판넬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두 인물을 마주 보게 한 것은  둘 사이에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槿友會)라는 접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1930년 황애시덕은 이화학당 선배인 홍애시덕이 결성 준비에 참여한 근우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일본 유학 중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고 1919년 고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총무로 활동한 그는 일제에 의해 검거돼 3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판넬 아래 그가 출소 후 찍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수형자 6명의 출소 기념사진이 눈길을 끈다. 황애시덕은 뒷줄 우측에서 첫 번째다. 흰색 한복을 입고 정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일제에 대한 항거를 멈추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실제로 그는 복역 후에도 뉴욕으로 건너가 재미교포들의 조국 광복 운동을 후원하는 등 독립을 향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애국 부인회 총무 황애시덕(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서기 신의경(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의 출옥 기념 사진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대한민국애국 부인회 총무 황애시덕(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서기 신의경(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의 출옥 기념 사진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황애시덕의 반대편으로 돌아서면 황애시덕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활동하다 검거된 신의경(1898~1988)이 있다. 그 맞은편에는 본교에서 약 20년간 교수로 재직한 최선화(1911~2003)가 있다. 영어연극 ‘아이반호’(1819)에 출연한 그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영어로 연극을 진행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영어에 재능을 보인 그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5년간 영문 타자 과목을 가르쳤다. 광복 후 그는 1954년부터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68년 창설된 비서학과(현 국제사무학과)로 자리를 옮겨 약 20년간 본교의 여성 인재 배출에 힘썼다.

1936년 상해로 떠난 그는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독립당과 그 산하단체인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활동하는 등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힘썼다. 한편, 그의 근대적인 사고관은 중일전쟁으로 떠난 피난길에서 쓴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에서 잘 드러난다. 아기의 이름을 영어식 이름인 제시라고 지은 이유를 그는 이렇게 밝힌다. 

 

“집안의 돌림자가 ‘제’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 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중략) 우리 아기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 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었다”

 

이처럼 조국의 독립을 향한 행보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하와이, 상해, 중경 등 해외에서 활약한 이화인 여섯 명의 발자국들이 찍혀있었다. 이들과 함께 현재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이화인은 24명이다. 김혜숙 총장은 “자료와 증언으로 등록된 24명 이외에도 수많은 이화학당의 학생, 졸업생들이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의 도슨트로 활동하는 안세연(정외·17)씨는 “그동안 독립운동가들은 남성 위주로만 설명돼왔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이화의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게 돼 같은 여성으로서 뿌듯하다”며 “유관순 열사의 사진 2장이 최초 공개된 만큼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더 많은 주목을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24일 독립 열사 김복희 씨의 딸 전인자(성악·65졸)씨도 이화역사관을 찾았다. 전씨는 “1세기가 지나서라도 이렇게 어머니의 공적이 재조명되니 감개무량하다”며 소감을 전했다.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24일 독립 열사 김복희 씨의 딸 전인자(성악·65졸)씨도 이화역사관을 찾았다. 전씨는 “1세기가 지나서라도 이렇게 어머니의 공적이 재조명되니 감개무량하다”며 소감을 전했다.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