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리는 엘리펀트 북클럽
안녕 우리는 엘리펀트 북클럽
  • 이유진 기자, 김보영 기자
  • 승인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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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과 페미니즘 독서 소모임 ‘엘리펀트 북클럽’

“감기가 심하다는 건 들어봤어도 페미니즘이 심한 건 뭔지…”

동시대 한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와 머리에 팍 꽂히는 유쾌한 표현, 책에 영감을 받아 작업한 그래픽 작품까지. 학기 중 과제가 너무 많아 방학에만 진행하는 모임이지만 그마저도 굳어진 습관처럼 성실히 기록해 예술로 승화해낸다. 작년에 막 결성해 두 번째 회지 발행을 앞두고 있는 본교 시각디자인과 페미니즘 독서 소모임 ‘엘리펀트 북클럽’을 만나봤다.

 

사진=이대학보DB
사진=이대학보DB

독서 소모임을 결성한 계기는 무엇인가

에보시: 작년에 졸업전시(졸전)라는 큰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뭐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터 항상 이 친구(마이아)가 페미니즘 독서모임을 만들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졸전 뒤풀이 때 이 얘기가 딱 나왔다. 그 자리에서 내가 “그럼 하면 되잖아”라고 말해 즉석으로 사람들을 모아서 모임을 만들었다.

마이아: 작년 졸전은 어느 때보다 페미니즘을 다룬 작품이 많았다. 졸전을 준비하며 우리 모두가 서로 말하지 않아도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더 커졌다.

 

모임으로 끝나는 아니라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엮어 회지를 발행한 특징이다

빌라넬: 우리가 시각디자인과다 보니까 ‘책을 읽고 시각디자인과에서 낼 수 있을 만한 작업물을 같이 실어보자’고 해서 회지를 제작했다. 첫 번째 회지에는 녹취록과 각자의 작품을 담았다.

마이아: 친구들의 대화를 듣는 느낌이 녹취록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 같다. ‘나도 지금 이 대화에 끼어들고 싶다, 쟤 되게 어려울 수 있는 주제인데 재밌게 말한다’ 이런 친근한 느낌?

에보시: 회지를 만들 때 걱정됐던 점은, 우리의 목소리가 공식적인 힘을 갖게 된다는 거였다. 예민한 이슈를 다루니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살아가고 있는 디자인과 학생들 중에 과거의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회지를 보고 조금이라도 뭔가 얻어갔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제작을 결심했다.

 

여태까지 진행된 모임에 대해 설명해 달라

에보시: 작년 여름, 1회 차 모임에서는 기본적인 페미니즘 책들을 읽었다. 언제나 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읽지 않았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페미니즘과 대중 문화 간의 관계를 다룬 앤디 자이슬러의 「페미니즘을 팝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바이블 같은 수잔 팔루디의 「백래쉬」를 읽었다. 겨울방학에 있었던 2회 차 모임에서는 성소수자와 교차 페미니즘을 다뤘다. 「#성소수자_LGBT(Q)」와 봄알람의 「페미니즘을 퀴어링!」, 박차민정 교수님의 「조선의 퀴어」를 읽었다. 이때는 1회 차보다 퀴어에 집중해서 주제를 다룰 때 좀 더 조심스럽게 다가갔던 것 같다.

빌라넬: 이때가 이 주제를 선택하기 좋았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방학 전에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가 있었는데 시위에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할 수 있다고 해서 논란이 됐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에보시: 지금까지는 이론적인 부분에 집중했다면, 이번 여름 방학에 열 3회 차 모임에서는 ‘여성 개인으로서 어떻게 삶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책들을 읽기로 했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돈을 벌고 관리하면서 살 것인지 좀 더 알아갈 것이다.

 

작년 발행된 엘리펀트 북클럽의 첫 번째 회지사진=엘리펀트 북클럽
작년 발행된 엘리펀트 북클럽의 첫 번째 회지
사진=엘리펀트 북클럽

새내기 때와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나

마이아: 남에게 묻어가지 않는 삶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동반자를 찾는다거나 나의 삶을 은근슬쩍 다른 사람에게 묻어가려는 게 아니라 ‘혼자서 어떻게 꾸려야지’라는 생각도 하고.

에보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나 자신에게 좀 더 집중을 많이 하게 됐다. 점점 나 혼자의 미래가 확실해지는 느낌이 든다. 누구와 함께 꾸려가는 삶, 그 사람이 사주는 집, 이런 누군가의 개입이 있는 미래가 아니라, 어떻게 스스로 영위하는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캣니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과정 같다. 전에는 성차별의 존재를 인식하고 싶지 않아서 나 자신을 속여왔는데, 대학에 와서 나를 속이는 걸 그만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색할 수 있었다.

빌라넬: 내가 사는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배우면서 ‘이런 자세와 신념을 갖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보게 됐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로 가능성이 커진다고 생각한다.

 

북클럽 활동을 하며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나

캣니스: 사실 회지가 디자인 업계 안에서만 알려질 줄 알았는데, 부산에 있는 한 책방에서 50대 남성 분이 보시고 감사하다고 댓글 길게 달아주셨을 때 신기했다. ‘이런 결과물을 내줘서 감사하다’고 해주셨는데 다양한 사람들에게 우리 목소리가 닿을 수 있다는 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이아: 「자기만의 방」을 읽을 때 작가가 신랄한 말투로 당시의 남자들을 조목조목 까는데 그 말투 자체가 너무 웃겼다. 근데 모여서 얘기해 보니 다 같은 부분에 형광펜 쳐 온 게 재밌었다.

 

되고 싶은 선배의 모습이 있다면

에보시: 우리 과 특성인지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선배로서의 자의식이 전혀 없다.

닐라: (후배 입장에서 봤을 때) 선후배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자기 할 일 하면 어떻게든 후배한테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회지를 봤을 때 ‘같은 전공, 같은 또래 중 같은 가치관을 갖고 공부하는 선배들이 있구나. 그리고 그걸 이렇게 공식적인 형태로 만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이 후배로서 든든했다. 여기저기서 회지 잘 읽었다는 연락도 받고, 네덜란드 잡지사에서 연락이 오기도 하고.

빌라넬: 독립서점에 비치한 것도 ‘부딪혀보자’ 이런 거였다. 결과가 있는데 썩히긴 아까우니까.

에보시: 대단한 자신감이 있어서 보낸 게 아니라 ‘비치해도 된다고 하면 땡큐지, 돈 드는 거 아니니까!’ 하고 부딪혔던 것 같다.

닐라: 선배들이 했으면 후배들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니까.

 

사진=이대학보DB
사진=이대학보DB

졸업과 걸음을 함께 준비하는 소감은

빌라넬: 학교 다니는 동안 런닝머신 달리는 기분이었다. 힘은 드는데 제자리인 느낌? 그런데 끝나고 나니까 체력이 붙었다는 게 느껴졌다. 여태까진 누군가 정해준 커리큘럼이 있었는데 ‘이젠 길이 없어졌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 앨리스가 어두운 숲길을 따라가는데, 알고 보니 꼬리에 빗자루가 달린 강아지가 뒤로 걸으면서 앨리스의 길을 지우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길 없이 깜깜한 숲 속 앨리스 혼자 남은 상황이 나와 비슷했다. 앨리스처럼 패닉해서 울진 않았지만. 앞으로 남은 건 ‘내가 어떻게 그 길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니까. 그만큼 힘들기도 할 것이다. 내가 이제 직접 만들어야 하니까….

에보시: 시험 당일 새벽 4시에 이상하게 편해지는 마음, 그런 위치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교환학생 갔을 때는 미래 생각에 많이 불안했다.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일이 정기적 구인을 하는 분야가 아니다 보니까. ‘내가 싫어하는 것도 먹고 살려면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후에 캣니스와 막연히 ‘졸업하고 디자인 스튜디오 차리자’ 이런 얘기를 했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러고 나서 불안함이 사라졌다. 하게 될지 안할지는 모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캣니스: 저번 학기 끝나는 날에 그동안 유난히 힘들어했던 수업에서 시험 출력했던 포스터들 들고 집에 가는데 버스에서 눈물이 터졌다. 엄마가 그걸 보고 ‘너 학교가 정말 좋았구나’ 하더라.

마이아: 시원섭섭한 느낌?

캣니스: 시원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섭섭한 게 컸다.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학기마다 어떤 성장의 결과물이 나왔는데, 이제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

닐라: 이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자질구레한 차별에 휘둘리지 않고 내 공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빌라넬: 나이에 상관 없이 돈 많이 벌어서 하고 싶은 건 하나 있다. 내 소유의 건물을 하나 사서 여학생들 작업실을 무료로 제공해주고 싶다.

마이아: 거의 ‘빌라넬 스크랜튼’이다.

닐라: ‘너의 길을 가거라….’

빌라넬: 학교 다니면서도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했지 않나. 프린터, 플로터 같은 것도 구비해 놓고 싶다.

에보시: 난 여성들이 나를 보면서 ‘저렇게 해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좋겠다. 피아니스트는 용모를 단정히 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는데, 흰 머리를 풀어헤친 채 연주하는 마르타 아르게치라는 여성 피아니스트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닐라: 나는 북클럽 첫 번째 회지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이름을 숨기면서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까진 아니지만 괜한 걱정이 있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되게 좋았다.

 

여성 창작자로서 북클럽의 목표는 무엇인가

에보시: ‘여성 디자이너, 여성 창작자로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만을 해야 하는가?’ ‘남성 디자이너들은 주제 면에서 다양성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페미니즘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는 여성 디자이너들이 많다. 페미니즘을 작업 소재로 삼을 때 우리를 비롯한 앞으로의 구성원들에게 모종의 가이드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다.

 

 

엘리펀트 북클럽에서 읽은 책들

 

 

「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더스토리, 2017

페미니즘 문학 비평의 장을 연 버지니아 울프의 고전.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타인의 영향에서 벗어나 생각을 키우며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저자는 여성이 자립하기 위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재력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문장은 지금까지 유의미하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페미니즘을 퀴어링!」 - 미미 마리누치, 봄알람, 2018

페미니즘과 퀴어는 서로 대립되는 것일까. 이 책은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이 서로 영향을 주고 대립하면서 쌓아온 역사에 대해 말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이론들을 설명하고 그 개념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한다. 저자는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떨어질 수 없는 연대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퀴어 페미니즘’에 대해 역설한다.

 

 

 

「페미니즘을 팝니다」 - 앤디 자이슬러, 세종서적, 2018

‘Girls can do anything’ 문구가 박힌 가방, 여성을 내세워 광고하는 스포츠 브랜드. 우리가 페미니즘적이라고 느꼈던 것들이 사실 그렇지 않다면? 페미니즘이 상업화되면서 본래 페미니즘이 외치던 가치와 투쟁은 그 힘을 잃는다. 이 책은 상업화된 페미니즘이 어떻게 변질됐는지 말하며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엘리펀트 북클럽의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인스타그램 @elephant.bookclub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모임과 회지 특성상 인터뷰이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