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이 동서대 초빙교수
박선이(영문·84년졸) 동서대 초빙교수

아마도 위화도 회군이나 병자호란만큼 먼 얘기겠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 시험을 치렀다. 명문고 입학을 위해 머리 싸매던 시절보다는 조금 뒤다. 합격선 안에 들면 지역 내 고등학교에 추첨 배정하는 연합고사였다. 시험 날 아침, 엄마가 아무 생각 없이 끓여준 미역국을 먹으며 여느 날처럼 조간신문을 읽었다. ‘오늘의 한자’ 쯤 되었을까? 그날의 한자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로 새롭게, 란 뜻풀이 위에 국물을 좀 흘렸던 것 같다.

시험 첫 과목은 (아마 요즘도 그렇듯이) 국어. 이게 웬일인가! 바로 그 일신우일신 문제가 나온 것 아닌가! 덕분에 시험을 잘 보고 무사히 서울 변두리 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일생의 교훈. 읽어야 산다. 

읽고 쓰는 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치열하게 읽지는 못했다. 되는 대로 읽었다. 너무 어려우면 밀어놓았다. 재미없으면 덮었다. 이 방, 저 방, 책상 위에 밥상 위에 이불 위에 가끔은 냉장고 안에 읽다 만 책을 ‘ㅅ’자로 엎어놨다. 

책등 꺾인다고, 장서가였던 외삼촌에게 등짝을 맞기도 했지만 정작 부모님은 아무 상관도 안하셨다. 읽다 만 책이 여기 저기 굴러다니면 책갈피를 끼워 한쪽에 정리해주셨다. 나중에 ‘서재 결혼시키기’(지호)라는 책에서 저자 앤 패디먼이 침대와 계단참, 의자 위에 그렇게 책을 깔아놓고 사는 이야기를 읽고 동지의식에 뿌듯하기도 했다. 내 살림을 살면서는 이사할 때마다 짐 싸는 분들이 혀를 찼다. 그 흔한 피아노도 장롱도 없어서 싸게 견적을 냈는데 책꽂이 마다 두 줄로 꽂은 책이 꺼내보니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나의 책읽기는 폼 나게 말하면 무정부주의적이었고, 실제로는 그냥 잡식성이었다. 꼭 좋은 책을 골라 읽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마구잡이로 책 읽는 취향을 격려한 한스 엔첸스베르거(H.M.Enzensberger)는 독서의 무정부주의적 행위 특성을 높이 샀다. “문장 전체를 건너뛰고, 문장을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읽고, 그것을 오해하고 다시 만들어내고, 계속해서 엮어 나가고, 가능한 한 모든 연상 작용으로 치장하고, 그 책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결론을 끄집어내고, 글에 대해서 화를 내고, 기뻐하고, 잊어버리고, 표절하고, 책을 어느 한쪽 구석으로 내던지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p37) 읽기 습관은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아름다운가!

소설이건 인문서이건 만화건 전문 서적이건 닥치는 대로 읽다보면 자기만의 취향과 감식안이 생긴다. 무엇이건 다양하게 많이 먹어본 사람이 미식가로 성공하기 쉬운 것과 비슷한 길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책 읽기는 남다른 취미나 특기가 아니라, 밥 먹고 물 마시는 것 같은 일상 행동이라야 맞다. 

거기 더해, 책 읽기는 사실 보기 드물게 비사회적이고 독보적인, 나 혼자만의 즐거움을 얻는 행위다. 책을 읽을 때는 책과 나 둘 뿐이다. 물방울 뽀글거리는 소리와 수면 위에 비껴드는 햇빛만이 고적하게 느껴지는 내면적 집중, 자발적 고립의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수면 위로 올라갈 때의 기쁨을 진정으로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자기만의 즐거움을 가진 여자는 불온하다. 하지만 불온한 여성들이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꿨다.

내가 요즘 즐거움을 누린 책 두 권을 여러분 앞에 던져 놓고 싶다. 김은성이 함경도 출신 월남민인 어머니와 가족(막내딸인 자신을 포함해)을 그린 「내 어머니 이야기」(전4권, 애니북스)는 「토지」에 필적하는 대하서사극이다. 100년 전 증조할머니에서 발원해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작가 세대로 이어지는 굴곡진 가정사는 일제강점과 해방, 한국전쟁, 전후 경제성장기를 꿰뚫는 현대사이자 여성사다. 작가의 어머니를 통해 재현되는 함경도 사투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언어학적 보고다. 

박준우가 쓴 「노래하는 페미니즘」(한길사)은 미국 대중음악을 페미니즘의 눈으로 읽어낸다.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에서 시작해 비욘세의 ‘Lemonade’, 2018년 러시아월드컵 결승전 경기장에 뛰어든 푸시라이엇까지 이어지는 여성뮤지션과 이들의 음악 이야기가 ‘넘나’ 재밌어, 책에 나오는 음악들을 유튜브로 찾아 들으며 읽었다. 산만하기 짝이 없는 멀티미디어틱 책읽기의 즐거움이라니! 

박선이 동서대 초빙교수 

 

*1984년 본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에서 기자와 문화부장, 논설위원으로 28년간 일했다.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2015년부터 동서대학교 등에서 미디어글쓰기 등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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