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같은 계획 세우시나요?
매년 같은 계획 세우시나요?
  • 채라다(국문·08년졸)
  • 승인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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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 산다 -5-
채라다(국문·08년졸) 방송PD는 EBS 방송제작본부 교육다큐부 PD로 재직 중이다. 2010년 방송국에 입사해 <하나뿐인 지구>,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리얼체험 땀>, <두근두근 학교에 가면>, <사이언스타Q>, <다큐프라임 / 카레남녀> 등 다큐멘터리 다수를 연출했다.

얼마 전, 2019년 새해 계획을 세웠다. (5월에 새해 계획이 웬 말이겠냐만) 그래도 ‘아직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는 마음가짐으로 새 노트에 계획을 하나씩 적었다. 영어 공부, 운동, 운전 연습, 취미 생활, 일기 쓰기, 하고 싶은 프로그램 기획안 쓰기 등. 하나씩 정성스레 적고 나서 깨달았다. 나는 대학 신입생 때부터 근 15년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새해 계획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몇 가지만 빼면 어린 시절 방학 계획과 다를 게 없었다.

이런 순간이 오면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리고는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건가’ 허무함이 밀려온다. ‘대학생 때부터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제대로 쉰 적도 없는데 왜 개인적 목표는 뭐 하나 이뤄놓은 게 없을까’ 하는 반성에 급기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난 왜 늘 이럴까’ 하는 원망에까지 이른다.

후회와 자책은 사실 나의 주특기다. 비슷한 좌절을 대학 입시 때에도, 4년간 취업에 실패해 괴로워했던 어느 겨울에도, 방송국 입사 후에도 매번 느꼈다. 1년간 공들인 프로그램이 방영된 얼마 전에도 같은 불안감에 힘들었고, 심지어 다음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이렇게 생각한다. 왜 나는 좀 더 잘하지 못할까, 왜 좀 더 열심히 하거나 부지런하지 못할까, 왜 나는 제자리일까.

그래도 이럴 때마다 반복해 읽으며 불안한 마음을 다잡게 하는 책이 있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산 책, 소설가 김연수의 에세이 「소설가의 일」이다.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중략)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군가 고민할 때 나는 무조건 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 결과가 아니라 그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소설 쓰는 법에 대한 에세이인 줄 알았는데 삶의 태도를 배웠다. 버지니아 울프, 무라카미 하루키, 김연수 같은 소설가들이 매일 글을 쓰며 작가가 되었다지만, 이 책은 그런 ‘노력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다. 「소설가의 일」은 오히려, 삶에 있어 중요한 건 성공이나 실패 여부보다 꾸준함을 통해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TV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순례길을 이동하는 티베트 수행자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나는 오체투지를 해서 최고의 수행자가 될 거야’ 라는 식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최고의 수행자는 없다. 그들은 그저 습관처럼, 원래부터 주어진 숙명처럼 그 길을 온몸으로 걷는다. 조바심이 나고 불안해도 다 떠안고 소걸음으로 천천히 길을 간다. 길의 끝에 도착하면? 인간은 어떻게든 변화하고 성장할거라 믿는다. 설사 길의 끝에 도착하지 못해도 어쨌든 걸었다는 그 사실이, 그 과정이 우리를 변화시킬 거라 믿는다.

「소설가의 일」을 다시 읽은 뒤에야 신년 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있었다. 올해 계획은 이것이다. 15년째 반복되는 이 계획을 ‘그냥 한다’. 영어를 잘해서 유학을 가고, 운동을 잘해서 대회에 나가고. 이런 목표는 이제 계획에 넣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그냥 하면서’ 욕심과 불안 없이 수련하듯 살고 싶다. 매년 같은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매일 소걸음으로 천천히 반복하며 살고 싶다.

Done is better than perfect(실행하는 것이 완벽한 것보다 낫다)! 페이스북 직원들의 슬로건이라는 이 말도 ‘일단 해봐!’ 라는 격려로 들리면서 조금씩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