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대학 정미령 명예교수 옥스퍼드=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정미령 교수 타임라인)1. 정씨의 본교 재학 시절 사진이다. 50년이 넘은 사진에서도 보이는 대강당. 2. 정씨의 본교 사범대학 학사학위증3. 정씨의 옥스퍼드 대학원 학생증4. 정씨의 교수시절, 저녁식사 자리에서 깜짝 생일파티로 축하받는 모습5. 정씨는 교수 활동을 해리스 멘체스터 컬리지(Harris Manchester College)에서 했다. 사진은 본 컬리지 도서관에서의 정씨옥스퍼드=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옥스퍼드 대학 정미령 명예교수
옥스퍼드=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4주동안 진행된 영국 해외취재가 이번 주로 막을 내린다. 본지는 영국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오기 위해 영국에서 활동하는 동문 인터뷰, 옥스퍼드 대학(Oxford University)의 토론 문화 기획 기사를 실었다. 이번 학기 해외취재 시리즈의 마지막 주인공은 바로 옥스퍼드 대학 명예 교수 정미령(교육·66년졸)씨다. 밝은 모습으로 본지 기자들을 맞아준 그와 옥스퍼드 곳곳을 누비며 얘기를 나눴다. 한국인 최초의 옥스퍼드 대학 교수 타이틀을 얻은 것은 물론, 두드러지는 학문적 성과까지 갖고 있는 자랑스런 동문의 이야기를 담았다.

정씨의 본교 재학 시절 사진이다. 50년이 넘은 사진에서도 보이는 대강당

한국인 최초의 옥스퍼드 대학 교수. 이화여중·이화여고·이화여대를 졸업한 그는 28살의 나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바로 본교에서 배운 교육학을 발전시켜 세계적인 교육심리학자로 거듭난 정미령씨다.

“그때 옥스퍼드 대학에 동양인이 많지 않았지. 아마 내가 최초의 정교수일 거야. 또 내가 최초로 은퇴한 명예교수야. 5년마다 교수직을 갱신해야 하는 이곳에서 은퇴가 쉽지 않은 일이거든.”

‘인지의 자율성(Free Cognitive Ability)’이란 개념을 처음 제시한 정씨는 당시 대세였던 지능지수(IQ)나 피아제(Jean Piaget)의 인지발달이론을 반박해 학문적 기여를 했다.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인간에게는 인지의 자율성이 있어 환경에 따라 인지 능력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통일화된 도구로 인지 능력을 측정해 문화나 지역이 다른 인간을 평가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는 처음엔 소수 학파 이론에 불과했지만, 몇 년이 지난 후 과학자들의 연구로 증명됐다. 1990년대부터 과학계 학자들이 유전자 연구를 통해 ‘인간의 유전자는 99.9% 같지만 그 유전자가 환경에 영향을 받아 차이를 보인다’라고 밝혔다. 정씨가 과학자들에 앞서 교육심리학적으로 인간 지능의 환경설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텔레비전에 연구 발표가 나오는 것을 보고 같이 연구하는 사람들과 깔깔 웃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정씨의 본교 사범대학 학사학위증

정씨의 이런 학문의 시작은 이화에서부터였다. 이규환 퇴임 교수(교육학과)에게 배운 한스 포퍼(Hans Popper)의 비교교육론이 그의 영국 유학 시작에 도움을 줬다. “그때 런던대학(University of London)에서 입학시험을 봤는데, 입학시험이 문제 13개를 주고 그 중 3개를 골라 논문식으로 답하는 거였어. 근데 아는 게 없어서 하늘이 샛노래졌지. 시험관이 보든 말든 기도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그냥 내가 아는 걸 쓰면 되잖아’. 그래서 문제랑 상관없이 이규환 교수님께 배운 내용을 썼어. 그리고 그 밑에 내가 교수라면 한국에서 온 학생에게 이런 문제 안 내겠다고 토를 달았어.”

이렇게 1971년 런던 대학에서 시작된 유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언어의 장벽 등 어려움이 많아 수료만 하고 끝이 났다. 그는 “런던 대학도 이렇게 어렵다면 차라리 옥스퍼드 대학에 가서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시험을 봤다”며 웃음을 지었다. 1974년 옥스퍼드 대학원에 입학한 정씨는 미국의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Jerome Seymour Bruner) 교수를 만나 인지심리학을 공부했다. 이는 정씨만의 이론이 시작된 계기가 됐다.

정씨의 옥스퍼드 대학원 학생증

이후 브루너 교수와 당시 학과장이었던 피터 브라이언트(Peter Bryant) 교수의 추천을 받아 1979년부터 에든버러 대학(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약 5년 동안 지능의 다양성을 연구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발달시키기 위해 심리학, 교육학, 인류학을 모두 배웠다. 그는 “1984년 지능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논문을 제출했다”며 “논문 심사하는 데 5개월이나 걸리더라”고 말했다.

“심사를 기다리면서 이삿짐을 다 서울에 보냈어. 한국 가서 이화여대 교수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거든. 당시 이화여대에서 제안을 받은 상태였어.”

하지만 논문 심사 후 그의 운명은 달라졌다. 5살부터 11살까지 400명을 대상으로한 질적 연구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질적 연구는 양적 연구와 달리 연구 대상의 말이나 행동 등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연구로, 정씨는 직접 연구 대상들을 인터뷰하고 말과 행동을 관찰했다. 그는 “왜 일반 통계가 아닌 질적 연구를 했냐는 질문을 받았다”며 “인간 발달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통계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질의응답을 하고 한 시간 동안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더라고. 합격이냐 불합격이냐가 갈리는 순간이었지. 그리고 다시 들어가자마자 교수가 ‘Congratulations(축하해)!’이라고 하더라고.”

정씨의 교수시절, 저녁식사 자리에서 깜짝 생일파티로 축하받는 모습

운명처럼, 논문을 심사한 사람은 옥스퍼드 석사 시절 인연이 있었던 브라이언트 교수였다. 타 대학 교수가 논문 주심이 되는 영국의 문화 덕분이었다. 논문 심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정씨는 브라이언트 교수에게 박사 후 연수(Post docctor) 특채 제안을 받고 옥스퍼드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생도 가르치며 지능의 환경설을 연구했다. 과학계의 증명으로 정씨의 학문적 위치가 확고해지자 1996년, 그는 옥스퍼드 정교수가 됐다.

영국에 온 지 40년이 넘은 지금, 정씨는 처음 유학의 꿈을 가졌을 때를 떠올리며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에서 온 선교사를 만나 영어를 배웠다”고 말했다. “이화여중 다닐 때 영어 선생님께서 선교사가 수업을 관찰하게 했어. 나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 수업 시간에 손들고 발표를 했지. 그 순간이 내 운명을 바꾼 거야.”

정씨는 이후 일주일에 3번 이상 선교사에게 성경과 영어를 배웠다. 그렇게 영어에 흥미를 가지게 됐고, 유학을 동경하게 됐다. 영국에 오게 된 건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정씨는 “어머니가 유럽에서 공부하면 가치 있을 거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막상 도착한 영국은 생각보다 순탄하지 않았다. 정씨는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 으슬으슬하고 막막했다”고 말했다. 당시 20~30만 원 정도만 가지고 유학길에 올랐기에 더욱 간절하게 공부했다. 그는 매 학기 영국문화원에서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지원받으며 학문에 매진했다.

“영국에서 맞은 첫 대보름날에 너무 슬퍼서 길을 걷는데 눈물이 주룩주룩 났었지. 그땐 영국에 한국 식당도 없고, 일본이나 중국 식당은 비싸서 갈 수가 없었어. 정말 고마웠던 게, 대사관에서 광복절 같은 날에는 한국 학생들에게 밥을 사줬어.”

정씨는 교수 활동을 해리스 멘체스터 컬리지(Harris Manchester College)에서 했다. 사진은 본 컬리지 도서관에서의 정씨
옥스퍼드=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한국에서 지낸 세월보다 영국에서 지낸 세월이 긴 정씨지만, 한국과 이화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그는 “내 머리는 여기 있지만, 가슴은 한국에 있다”며 “서양의 이성과 동양의 정서를 잘 접목해 두 강점을 갖고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전했다.

3년 전 정씨는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화 동문들을 모아 총동창회 영국 지부를 만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한국이나 이화가 너무 그리워.”

“지금 세계가 원하는 건 창의성이야. 자신의 전공을 잘 연구해서 자신만의 생각을 가져야 해. 읽고, 쓰고, 토론하는 능력이 필요한 거지. 난 이화와 옥스퍼드를 연결하려고 계획 중이야. 학생들이 여기 올 수 있게. 내가 연결 다리가 되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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