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남았다.”

같이 퇴임할 기자들에게, 그리고 2년6개월, 총 906일 간 학보 기자로 활동한 제게 건네고 싶은 말입니다. 살아남았다니. 사정을 모르는 이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학보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겠죠. 특히 2016년 동기 19명과 같이 시작해 2019년 혼자 학보사에 남게 된 저의 경우, 우스갯소리로 한 ‘살아남았다’는 표현이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안녕하세요, 이대학보 독자 여러분. 오늘은 학보사에서 ‘살아남아’ 퇴임을 앞둔 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제가 906일 전의 학보를 기억하는 마지막 현직 기자가 되리란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입니다.

학보사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었던, 그 최초의 시간으로 시곗바늘을 돌리겠습니다. 2016년, 여름. 그 해 이화의 여름은 가없이 펼쳐진 임해(林海)처럼 영영 푸르기만 할 것 같았습니다. 가을과 겨울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던 당시, 학교 안팎에서 이어진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들은 계산기만 두드리던 제가 전공을 잠시 접고 펜을 든 계기가 됐습니다.

겨울이 지난 2017년 1학기, 학보사에 자원했지만 막상 기자가 돼서 마주한 이화는 제게 너무 낯설었습니다. 당시 학교는 회복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저는 막 수습 딱지를 단 햇병아리 기자였습니다. 어려운 취재원과 통화하며 울거나,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아 질문하는 게 어려워 한참이고 멀뚱멀뚱 서 있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서는 4자 협의체에 대해 끈질기게 문의한 제게 ‘한채영 기자님, 그만 전화 거세요’라는 말도 했었습니다. 제가 문의한 내용이 4자 협의체 회의 사안으로 다뤄질 정도로 집요하게 취재했던 수습기자 시절은 개교 이래 최초, 직선제 선거로 뽑힌 김혜숙 총장의 취임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차장기자가 된 2018년, 미투(#MeToo) 운동이 대학가에 확산됐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곪아온 문제들이 하나둘 터져 나왔고, 본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행여 내 글이, 단어가 누군가에게 칼날이 되지는 않을까 조심 또 조심하며 살얼음판 걷듯 취재하고 기사를 썼습니다.

이후 부장 기자를 거쳐 퇴임을 앞둔 현재까지, 이화에는 매년 새로운 사안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 역사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기록했던 과거의 제 자신을 돌이켜 보니, 한참은 부족했고, 미숙했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소설 「百의 그림자」 황정은 작가가 책 말미에 적은 글입니다. 이대학보에 몸 담근 기자로서 2년6개월 동안 이 문장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화와 이화인에게 좀 더 부드러운 세상이 될 수 있도록 글로서 돕기를 바랐습니다. 폭력적인 사안일지라도 그걸 전하는 이대학보는 독자에게 폭력적인 신문이 아니길, 거창한 위로는 되지 못한다하더라도 따뜻한 그 무언가가 되길 바랐습니다.

편집국장으로서의 마지막 편지를 띄우게 됐지만, 후임기자들이 이후 더 나은 글로 여러분을 찾아뵐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남은 2번의 발행도 잘 마무리 짓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현장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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