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에스더, 조선여자의학강습소와 직접적인 관련 없어
박에스더, 조선여자의학강습소와 직접적인 관련 없어
  • 김수현 기자, 이화선 기자
  • 승인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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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고대) 의료원이 이화학당과 보구녀관 출신인 박에스더를 고대 의료원 역사에 포함해 수년간 홍보해왔다는 사실이 학내에 뒤늦게 알려졌다. 박에스더는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자 보구녀관에서 의료계에 입문한 국내 첫 여성 의사고, 23일(목) 정식 개관을 앞둔 이대서울병원이 본교 의료원의 전신인 보구녀관을 복원해 선보이기에 이번 사안에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보구녀관 당시 사진 제공=이화역사관
고대안암병원의 최첨단 융복합의학센터 공사 현장 이화선 기자 lskdjfg41902@ewhain.net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 박에스더

최첨단 융복합의학센터가 들어서는 고대안암병원 공사 부지 가설 울타리에는 박에스더가 고대 의료원 역사의 태동기에 포함돼 홍보되고 있다. 또 박에스더는 고대 의료원 홈페이지 ‘고대 의대 초기역사 인물 열전’에도 주요 인물로 명시됐다. 고대 의료원이 전신으로 주장하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설립자인 로제타 셔우드 홀(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이 보구녀관에서 박에스더와 인연이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본지 조사 결과, 현재까지의 역사적 사료에 따르면 고대 의료원과 박에스더는 무관하다. 「한국 의학의 빛이 된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에 의하면 박에스더는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해 이화학당 울타리 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 여성 병원 보구녀관에서 의학 교육을 받고, 1900년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서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 우리나라 최초 여의사가 됐다. 귀국 후 평양의 광혜여원과 서울의 보구녀관을 오가며 1910년 사망할 때까지 한국 여성 의료 사업에 헌신했다.

한편 고대 의료원이 전신이라 주장하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1910년 박에스더 사망 후 18년이 지난 1928년에 개소했다. 박에스더의 생존 당시에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현재까지 박에스더와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사이 직접적 연관성을 설명하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 의학의 빛이 된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의 저자 이방원 교수(사학과)는 “박에스더의 업적을 고대 의료원 역사의 태동기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며 “태동기로 명시하려면 박에스더와 고대 의료원이 실질적으로 연관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박에스더는 고대 의료원의 역사가 아닌 이화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이지희 의과대학장 또한 “박에스더는 고대 의료원과는 무관한 인물이며, 고대 의료원의 주요 인물이라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구녀관 당시 사진 제공=이화역사관

△본교 의료원 전신 보구녀관, 고대 의료원 전신은?

포털사이트에 ‘고대 의료원’을 검색하면 고대 의료원의 역사에 조선여자의학강습소가 포함된다는 내용의 기사가 2013년부터 약 120 건 보도돼있다. 고대 의료원은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설립자인 로제타 홀을 자 기관 역사의 주요 인물로 설정하고 2016년 로제타 홀 센터를 개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가 고대 의료원의 모태가 되는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박에스더의 생애와 의료선교활동’(이방원, 2007), ‘보구여관의 설립과 활동’(이방원, 2008) 등의 논문을 발표하며 여성 의료사 연구를 해 온 이 교수는 “특정 기관의 주요 운영 요소를 인적·물적 자원을 기준으로 구분했을 때, 1928년 개소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고대 의료원 역사의 시작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이화학당 내 보구녀관의 2대 책임자였던 로제타 홀이 여성 의사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1928년에 설립했다. ‘로제타 홀의 조선 여의사 양성’(김성은, 2007)에 따르면, 로제타 홀이 미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사회의 일원이었기에 이 강습소 또한 미북감리회의 물적 지원으로 운영됐다. 1928년 2월 미북감리회가 로제타 홀을 조선여자의학생 담당자로 임명한 이후로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설립이 추진됐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김종익의 유언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과정’(백운기·김상덕, 2011)와 ‘일제강점기 조선 여자 의사들의 활동’(최은경, 2016)에 의하면 당시 한국에서의 여성 의사 양성을 위해선 강습소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하지만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1933년 로제타 홀의 은퇴 후 미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사회와의 인연이 끊어지며 쓰던 건물을 비워야 했고, 자금 지원도 끊겼다.

그러던 중 김종익이 여성에게 의학을 교육하는 전문학교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사망 전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전문학교 승격을 위한 기금을 기부하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하지만 김종익의 부인 박춘자가 김종익의 유언과는 달리, 전문학교 승격을 위해 조직된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기성회가 아닌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일본인 교수에게 여자 의학 전문학교 설립을 위임했다. 이로써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된다. 이 학교가 바로 현재 고대 의료원의 전신이다.

따라서 조선여자의학강습소가 인적 자원으로 로제타 홀, 물적 자원으로 미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사회를 확보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인적·물적 자원 중 어느 것도 조선여자의학강습소와 같은 곳에서 확보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 교수는 이에 “미북감리회 선교사들이 이화학당, 보구녀관, 보구녀관 간호원양성소, 동대문부인병원,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설립 및 운영에 힘썼고 각각의 기관이 유기적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했던 점을 고려하면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이화의 의료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선여자의학강습소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간의 연관성에 대한 논쟁은 차후 연구를 통해 명백히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논란에 홍보실 김수정 팀장은 “학생들의 제보로 고대 의료원의 홍보 내용을 접했다”며 “이대서울병원 정식 개원 등에 대한 언론 홍보시 보구녀관과 최초 여성 의사 배출 등을 적극 홍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본교 의료원 홍보전략팀은 “올해 2월 이대서울병원 진료 개시와 함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본교 의료원의 전신인 보구녀관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홍보해 왔다”며 “고대 의료원의 홍보 내용에 대한 논란을 인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보구녀관과 로제타 홀, 박에스더 등을 이화의 역사로 알릴 예정이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