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뱀미디어 제작PD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 맨’(2019)의 주인공 토니는 삶의 유일한 이유이자 목표였던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자기 멋대로 산다. 입이 움직이는 대로 말하고 발길이 닿는 대로 가며 그저 물 흐르듯 살아내기만 한다. 나 또한 그랬던 거 같다. 인생 최대의 목표이자 꿈이었던 (혹은 그렇다고 믿었던) ‘드라마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은 번번이 방송사 취업의 문턱 앞에서 좌절되고 말았고 어차피 인생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한동안 무계획의 안일한 인간으로 살았다. 하지만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게으름에 대한 대가는 컸다. 점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 어느덧 꿈은 잊고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살아내기 바빴다.

시간이 흘러 스물아홉이라는 늦다면 늦고, 빠르다면 빠를 수도 있는 나이에 방송국이 아닌 제작사 막내 PD로 일을 시작하게 되고서도 내 삶의 기본 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PD라는 직함이 내 이름 뒤에 붙었고 운 좋게도 명품 드라마, 대작 드라마로 불리는 작품들에 내 이름 한 줄을 올릴 수 있었지만 나는 그저 드라마라는 환상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기 바쁜 직장인일 뿐이었다. 사람에 대해, 특히 ‘나’라는 존재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더 이상 내가 꿈꿨던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을 시작한 지 3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나 자신도 잘 모르고 내 상처도 돌보지 못하면서 남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 수가 있을까. 그렇게 나는 나만의 시간을 갖겠다며 홀로 북유럽으로 떠났다. 눈밭에 누워 쏟아져 내리는 별을 바라보며 윤동주처럼 별 하나하나에 나의 지난 경험들을 하나씩 불러내보았다. 막연하고 무모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내 과거는 그 나름대로 치열했고, 의미가 있었다. 실패가 있었기에 깨달음이 있었고 여러 번의 도전이 있었다. 결국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게 됐다. 그 어떤 것도 허튼 짓은 없었다.

나는 지금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이 꿈을 이뤘을 때, 오늘의 번민과 고뇌는 꿈을 이루는 과정 속에 녹아있는 의미 있는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노르웨이에서 바라본 하늘의 별들에 새겼던 것처럼 말이다. 나이도 경험도 그다지 많지 않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오만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삶의 불확실성 속에 불안함을 느끼는 후배들에게, 혹은 꿈조차도 꿀 수 없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막연함을 느끼는 후배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목표를 찾아가는 하루하루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삶에 있어 허튼 순간은 없다고. 마지막으로 너무나도 좋아하는 드라마의 대사 한 구절을 남긴다.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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