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팀워크와 수십 차례의 시뮬레이션 끝에 대역전극 이뤄내

4월11일 2심 최종 승소 판정을 받은 세계무역기구(WTO)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분쟁 재판을 맡은 고성민 사무관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4월11일 2심 최종 승소 판정을 받은 세계무역기구(WTO)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분쟁 재판을 맡은 고성민 사무관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한-일전은 종목과 관계없이 언제나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대역전극을 펼쳤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최근 통상 분야에서 한-일전 승전고를 울렸다. 세계무역기구(WTO·World Trade Organization)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분쟁 2심 승소 판정이 바로 그것이다. WTO가 위생 및 식물위생(SPS) 협정 분쟁에서 1심의 결정을 완전히 뒤집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승소의 중심에는 고성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분쟁대응과 사무관(법학·07년졸)이 있었다. 승소 판결이 결정된 지 약 2주 뒤인 지난 4월25일 논현동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이번 2심 판결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한번 자랑해달라는 부탁에 그런 성격이 아니라며 손사래 친 그는 인터뷰 내내 겸손한 모습이었다. 그는 1심 패널의 일본을 향한 편향적 판정을 2심에서 이길 수 있었던 토대로 꼽았다. 그 이유는 재판의 성격 차에 있었다. 1심은 조치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사실심’이라면 2심은 지난 조치의 정당성을 판단한 패널의 판단 과정을 다시 되짚는 ‘법률심’이기 때문이다.

고 사무관은 “이전에 제출했던 증거자료 중 검토하지 않았던 것을 발굴하고,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의 본질과 필요성을 상소 기구에 다시 한번 간결히 설명한 게 승소에 큰 도움이 된 거 같다”고 말했다. 또한 “1심 대응 단계에서 준비를 소홀히 해 패소한 것을 2심에서 반전시켰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맞지 않다”며 “1심과 2심은 논리적 일관성을 갖춰야 하기에 같은 주장을 했다”고 덧붙였다.

분쟁 절차와 과정을 간단히 설명했지만, 실제 분쟁 과정은 지독한 장기전이었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 후 2년 뒤 한국은 후쿠시마 주변 8개 현 수산물을 수입 금지했다. 2015년 일본은 WTO에 한국의 조치는 부당하다며 제소했고, 이후 절차에 따른 양자 협의가 이뤄졌지만 불발됐다. 결국 2016년 3월 일본이 1차 서면을 제출하며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됐다. 고 사무관은 2016년 10월 타과에서 WTO 분쟁을 담당하는 통상분쟁대응과로 오게 되며 이 분쟁을 맡게 됐다.

한국에 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1심에서 일본은 적어도 약 2년 간의 준비 시간이 있었고, 실제 100개가 넘는 증거를 앞세워 후쿠시마 원산지의 제품이 한국의 국민 건강과 보호를 위한 목표치에 절대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한국이 이에 대항할 문서를 작성할 시간은 채 6주가 되지 않았다. 그 사이 일본 측 주장을 분석해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반박하면서도 논리적 타당성은 갖춰야 했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수십 명이 오랜 준비를 했지만 결국 패소했다.

수차례의 서면 제출과 구두심이 있는 1심과는 다르게 2심은 단판 승부였다. 한 번의 서면 제출과 구두심리로 승패가 바뀌었다. 이를 위해 그를 포함한 분쟁 대응팀은 재판 전 제네바에서 수십 차례 모의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변호사들끼리 서로의 부분을 크로스체킹하며 논리를 보충하기도 했고, 발언문을 매일같이 수정하며 읽는 연습을 했어요. 20분이라는 발언 시간제한이 있었기에 발음부터 빠르기까지 하루 종일 가다듬었죠. 재판 직전에는 시뮬레이션에만 집중했어요.”

그는 이번 승리 요인에 팀워크가 빠질 수 없다고 말한다. 분쟁을 이기기 위해 여러 부처가 하나의 조직처럼 유기적으로 협력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분쟁 실무 역할을 한다면 식약처는 식품 위생 및 조치 관련 자료와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양수산부는 어종 해양 생태 분야의 자료를 검토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방사능 관련 자료를, 외교부는 일본을 향한 타국의 조치 등을 조사했다.

그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연합 동아리 활동 경험이 조직 생활을 하는데 밑거름이 됐다고 전했다. “영어 회화 동아리 내 ‘미라클 나잇’이라고 겨울 방학 동안 연극, 콩트 등을 준비해 무대에 올리는 활동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배우로 사운드 오브 뮤직을 공연했고, 다음 해에는 맘마미아를 감독했죠. 회장도 역임했었어요. 조직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도 다르고 행동 범위도 다른데, 이 경험은 사람을 이해하고 다양한 부처와 협의할 때 큰 도움이 됐어요.”

이화 안에서 그는 어떤 학생이었을까. 인터뷰에 동행했던 그의 친구는 그를 “법대에 흔치 않은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경직돼있는 여타 법대생과 다르게 그는 외부활동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대동제에서는 동아리원들과 함께 당시 법대 내 영문법학회 선배 어머님의 비법을 담은 떡꼬치를 팔아 완판 신화를 세우기도 했다.

법대를 다니며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는 놀랍게도 ‘통상법’이 아닌 ‘공공법’이었다. 관련 과목들도 재밌게 들었기에 미국 로스쿨을 졸업한 뒤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난민 신청자들의 변호를 했다. 한국에서도 연장 선상으로 이민 및 난민 정책과 관련해 일하려 했지만 기회가 닿질 않았다. 기회는 갑자기 찾아왔다. 인상 깊게 읽은 책 「나는 루소를 읽는다」의 작가를 우연한 계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가치관이 잘 맞아 그의 소속 회사 인턴으로 일하며 통상 분야를 접했다. “아버지도 그렇고 주변에 통상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이 있어 낯설지는 않았어요. 막상 원산지 등 통상 관련 업무를 하게 되니 한국에는 통상 자체의 전문가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고 사무관은 “통상은 외국 시간이 기준이 되기에 밤낮이 없고 이동도 많아 고된 분야”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일에 대한 열정은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그는 이번 승소가 정말 기쁘지만 실무자로서는 담담하고 싶다고 전했다. “분쟁의 기록을 꼼꼼하게 정리해서 선례로 잘 남기고 싶어요. 그것이 제 현재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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