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조금 특별한 시간을 갖는다. 서울 소재 맹학교에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일주일에 두 시간, 초등학교 미술수업에 들어가  아이들의 미술 교사 보조 역할을 한다. 이만치 말하면 대체로 ‘좋은 일 하시네’라고 말하거나 ‘미술수업이요?’ 하고 되물어온다. 

말이 미술교육 봉사지, 가끔은 그림 그리는 것보다 동요를 더 많이 부르다 오는 것 같다. 몇 아이들은 시각장애와 더불어 자폐성 중복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엄지와 검지 등 부분에 힘을 줘, 가위 입을 쩌억-벌려주자! 그리고 3초간 기다리기!” “오른손으로 종이를 사이에 끼우고 다시 손가락 배 부분에 힘을 줘 와앙-다물면 짜잔~ 종이가 잘렸다!” “자, 어떻게 했었지?”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약 20년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던 동작과 개념들을 잘게 부숴본다. 우리말에 ‘본다’는 단어는 또 어찌 그리도 많은지. ‘해볼까’, ‘보자’, ‘어때보여’ 등 행여나 말실수하지는 않을까 ‘본다’는 단어에 신경을 기울이다 보면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이쯤해서 맹학교 학생들 대상 미술교육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시각장애’라고 하면 암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전체 인구의 0.4%로 25만 명 정도, 그중 약 96%의 사람들은 저시력 증세를 갖고 있다.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보다’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다.

로모 효과를 준 것처럼 시야의 끝부분이 어둡게 보이는 눈, 빛의 유무로 세상을 파악하는 눈, 시야 안에 검정 원이 동동 떠다니는 눈 등, 위의 설명으로 부족할 정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많고 많은 방식이 있다. 난시가 있는 본인은 멀리있는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진 것처럼.

생각은 더, 더 흐른다. 내 앞의 이 친구들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미술교육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무언가를 ‘보고’ 있는 걸까? 더 많이 본다고 더 많이 아는 걸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들은 다양하고, 늘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내 방식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사람일 때도 있지만 실은 나 자신일 때가 더 많다. 우리가 서로 다른 눈을 갖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반복해도 늘 낯설고, 몇 번을 반복해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굳은 관념들은 매일 업데이트 된다. 

그렇다면, 수많은 시각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눈들이 정말 다양하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하지 않을까.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은 눈을 가진 듯 해도 세상을 보는 시각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다양함을 ‘이해하기’. 그리고 이해력과 더불어 이해심을 갖기. 그게 중요한 것 아닐까. 

하는 일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기진맥진한 상태로 누워 벽지 무늬의 개수를 헤아리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던 중에 일주일에 한 번 있던 아이와의 가위질 연습 시간이 아무 이유 없이 그리워졌던 순간이 있다. 사실 서로 다른 눈을 이해하는 비밀은 여기에 있던 것이 아닐까. 

당신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부딪혀 빚어내는 만남과 서로의 너무나 다른 시각이 의미 있어지는 순간.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멋대로, 함부로 단정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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