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라이더가 좋은 PD를 만든다
프리라이더가 좋은 PD를 만든다
  • 윤선영(방영·13년졸)
  • 승인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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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PD(제작1본부 시사교양1국)

나는 프리라이더를 만난 적이 없다. 남들은 잘만 마주치던데, 내겐 좀처럼 기회가 오질 않았다. 매 학기마다 조별과제를 했는데도 그렇다. 친구들과 조를 꾸리든, 모르는 사람과 조를 꾸리든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진해서 조장을 맡았고, 조원들은 내 말을 잘 따랐다. 절반은 운이 좋았던 덕이라 생각했다. 나머지 절반은 내 리더십의 성과라 여겼다. 취업 자기소개서 쓰다 보면, 스스로의 장점을 묻는 질문을 종종 만나게 된다. 나는 그때마다 같은 문장을 적었다. ‘저는 협업을 잘하는 리더입니다’

내 착각이었다. 막상 PD가 되고 나니 가장 어려운 게 협업이다. ‘이건 FD한테 부탁하고, 나는 다른 것부터 챙겨야지’ 생각하다가도, ‘아니지, 아니야. 전부 내가 처리하는 게 낫겠어’하고 돌변했다. 눈 앞에 보이는 일을 모두 내 몫으로 끌어모았다. 어느 순간, 일이 처리되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마음이 다급해지고 실수가 늘었다. 결국 보다 못한 선배가 한마디 던졌다. “방송은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야.” 그제서야 내 문제점이 보였다. 나는 도통 남에게 일을 나눠주려 하질 않았다.

대학 시절 내내 ‘무늬만 조별과제’를 했다. 기획도 내가, 섭외도 내가, 촬영에 편집까지 내가 다 했다. 팀원들에겐 아예 일을 주지 않거나, 보조적인 일만 맡겼다. 

엉터리 협업이 실전에서 통할 리 없었다. 대학교 조별과제는 며칠 밤만 새면 혼자서 마칠 수 있다. 네다섯 명 몫의 일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국 업무는 규모부터 다르다. 한 프로그램에 동원되는 스태프가 많게는 100여 명에 이른다. 미술팀이 세트를 세우고, 조명팀이 빛을 만든다. 촬영 감독들은 현장을 프레임에 담고, 기술 감독들은 영상의 품질을 책임진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어떤 천재도 이를 혼자 감당할 순 없다.

좋은 PD는 일을 잘 나누는 사람이다. 제작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수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새로운 업무들을 적절히 분배하는 것이 PD의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한쪽에서는 과로하는 사람이, 또 한쪽에서는 노는 사람이 생긴다. 이런 불균형은 현장 분위기를 저해하고,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모든 스태프들이 함께 빛날 수 있는 판을 짜는 것, 그것이 PD의 임무다. 중요한 만큼 어려운 일이다.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다.

탈없이 흘러간 조별과제들이 못내 아쉽다. 혼자서 모든 걸 해치우지 않고, 조원들과 적절히 일을 나누었다면 어땠을까? 의견이 안 맞아 서로 싸웠을 수도 있다. 프리라이더 때문에 마음 고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협업 능력이 한 뼘이라도 성장한다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학교에서 헤맨 만큼 실전에서의 시행착오가 줄어든다.

오늘도 이화동산에는 조별과제로 고통 받는 친구들이 가득할 것이다. 진척 없는 자료 조사, 산으로 가는 회의, 다가오는 제출 날짜, 원망스러운 교수님……. 그래도 기운 냈으면 좋겠다. 망한 조별과제는 있어도, 배울 것 없는 조별과제는 없다. 프리라이더를 만났는가? 당신은 지금 좋은 PD가 될 자질을 기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