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음식 먹으러 갈래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비거니즘을 지향하기로 했다고 선언하고 머리 싸매며 요리법 검색하고 있으면 문득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 할 말을 찾고 있으면 “채식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아 부끄럽지만…” 하고 덧붙이는 사람. 먼저 채식 주문법을 검색해 오고, 역시나 지각하는 나를 위해 미리 음식을 시켜두고 반겨주는 사람. 슬슬 집에 갈 준비하며 ‘다음엔 어디 갈까’하고 물으면 학교 앞 어딘가에서 비건 떡볶이를 판다고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베푼 적 없는 배려를 베풀고도 생색낼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 하나 잘 키우기도 벅찬 내게 이런 사람들은 연구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미지의 보물섬이다. 혼자만의 공간이 너무 중요한 나머지 남의 사정에 게으르고 편파적인 정보만을 수집하는 내 패턴에 별 거부감 없이 적응해 버린 이들이 얼마나 고맙고 매력적인지.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모퉁이에는 머쓱함과 미안함이 사이좋게 기다렸다.

어디 그뿐인가. 그렇게 돌아온 집에는 밥 먹듯 저지르는 잘못을 눈감아주는 사람들. 안 치워진 식탁을 용서하는 것도 모자라 팔려고 꺼내놓은 책에 남아있는 필기 자국을 대신 지워주는 사람. “유진이는 바쁘니까…” 대가도 바라지 않고 몇 시간을 할애해 자신과 하등 관련도 없는 행사를 위해 소품을 만들어주는 사람. 마라샹궈 먹기로 한 약속을 까먹은 사람은 난데 마음 불편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다섯 통이나 보내는 사람.

하루 종일 무차별적인 다정함의 공격에 비틀거리다 곰곰이 생각한다. 예전엔 분명 나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똑 부러지는 사람을 동경하고 비슷한 신념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헤맸던 것 같은데.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편안해진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의 결론은 이렇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나밖에 모르는 나를 고분고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잘해주는 일을 반드시 완성해야만 하는 숙제로 내고 지키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이 좋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세상의 논리로 이기려 애쓰거나 까탈스럽게 굴 필요도 없다. 열정을 있는 대로 포장해 전시하는 뻔뻔함이 박수받는 세상에서 그 기대에 부응하려 아등바등 애쓰지 않아도 된다. 결국 나에게 좋은 사람은 그 자체로 빛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들과 있는 내 모습을 사랑하도록 허락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어쩌면 여러 시행착오 끝에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란 환상을 포기했는지도 모르지만.

이해할 수 없이 따뜻한 사람들아. 난 항상 좋다고 말할 준비만 해두면 될까? 이렇게 또 지나치게 이상화하며 호들갑 떨면 긴 대답도 없이 그저 웃겠지만. 다음엔 아무것도 깜박하지 않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또 찾아올 날에는 알아봤다는 그 떡볶이 먹으러 가자. 마라샹궈 사줄 기회 주는 것도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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