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민(民)의 시대를 선포하다
3·1 운동, 민(民)의 시대를 선포하다
  • 한채영 기자
  • 승인 2019.0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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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정병준 교수가 최초 발견한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편지로,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 파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제공=정병준 교수
사진은 정병준 교수가 최초 발견한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편지로,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 파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제공=정병준 교수

타닥타닥. 손가락이 타자기 글쇠를 바쁘게 두드린다. 하얀 종이 위에 들쭉날쭉한 농담(濃담)의 글자가 찍혔다. 작성자 신한청년당 총무 여운형, 작성일자 1918년 11월 29일.

「우리 한국인들의 호소에 귀기울여주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끔찍한 억압적 통치하에 놓여왔으며 지금도 그러하지만, 세계에는 거의 잊혀졌으며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동봉된 문서에 묘사된 것처럼 이러한 상황을 윌슨 대통령과 동료 시민들에게 부디 전달해주십시오.」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작성한 편지와 청원서를 미국 윌슨 대통령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크레인에게 전달했다. 이 문서는 이후 1919년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과 3·1 운동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불씨를 당겼다.

정병준 교수(사학과)가 발견한 것이 바로 이 편지 원본이다. 정 교수는 여운형이 보낸 편지 사료를 미국 컬럼비아대(Columbia University) 버틀러도서관에서 약 100년 만에 발견했다.

정 교수가 먼지 쌓인 서류 뭉치 틈에서 발굴해낸 ‘보물’은 이뿐만이 아니다. 파리강화회의로 가던 김규식이 적은 청원서 초안, 무명으로 남아있던 여성 독립운동가 ‘현 앨리스’의 자료 등 세계 여러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사료, 재조명한 인물만 해도 열 손가락을 꼽는다.

이처럼 한국현대사를 누구보다 깊이 탐구해온 역사학자 정 교수에게 3·1운동이란 어떤 의의일까. 그는 당시 조선인이 부정의 알을 깨고 나와 각성할 수 있었던, 기적과도 같은 에너지였다고 말한다.

“1910년 대부분의 백성들에게는 조선이 망하는 건 비극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을사조약으로부터 5년, 또는 청일전쟁으로부터 약 15년 동안 그런 기나긴 체념과 자조의 시간이 조선인들의 정신을 바닥까지 떨어뜨렸죠.”

정 교수의 말에 따르면 조선은 1910년대만 해도 이미 기나긴 암흑기를 걸어왔던 상태였다고 한다.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이 하루아침 나온 글은 아니란 의미다. 1910년대의 조선은 이미 열패감이라는 타성에 젖어있었다.

3·1운동은 그때, 아무도 희망을 점치지 않았던 바로 그 시점에 폭발하듯 한반도를 흔들었다. 도화선은 여운형의 편지,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파견, 그 외 독립운동가들의 열띤 움직임이었다. 약 오천년 만에 한반도에서 군(君)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백성이 우뚝 선, 바야흐로 민(民) 중심 사회의 서막이었다.

정 교수는 한반도의 역사를 3·1운동 전과 후로 나눌 수도 있다고 말한다. 3·1운동을 기점으로 조선은 군주의 나라에서 백성의 나라로 바뀌었다.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이 3·1운동의 역사를 써내려간 변화의 주인공이었어요. 민초들이 국가의 주인으로 등장해 목소리를 낸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3·1운동에 참여한 무수한 민중들은 독립을 얻지는 못했지만 민족적 자아를 되찾았다. 3·1운동에서 소리 높여 외쳤던 만세의 울림은 오랜 기간 한민족의 정신을 두텁게 덮고 있던 열패감과 무력감을 조각조각 떼어냈다. 그리고 한민족은 만세를 외치던 양 손으로 바닥을 짚고, 툭툭 털고 일어났다. 한반도에 희망이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정 교수는 묻는다.

“그렇다면, 3·1운동은 성공인가요, 실패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