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봄날의 함성, 그곳엔 남녀도 신분도 없었다
100년 전 봄날의 함성, 그곳엔 남녀도 신분도 없었다
  • 곽태은 기자
  • 승인 20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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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의병장 ‘안사람 의병대’ 윤희순 의사

“아버님, 저도 의병에 나서겠습니다. 함께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1895년 10월8일 새벽, 조선의 궁궐이 뚫렸다. 일본 자객에 의해 조선의 국모가 시해되자 전국 각지 유생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 중 유가(儒家)의 며느리, 어머니의 의무를 벗어던지고 시아버지 유홍석을 따라 의병에 출정하려던 조선 양반가 여인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1860~1935)다.

조선 여성들은 목숨이 위험한 전란 중에도 직접 나가서 싸울 수 없었다. 적군에 의해 몸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절개를 지키는 것이 유교사회 속 여성들의 의무였다. 그러나 윤희순 의사는 “나라를 구하는 데에 남녀의 구별이 있냐”며 의병들에게 옷과 음식을 조달하고, 춘천 부녀자들을 모아 ‘안사람 의병대’라는 여성의병단체를 조직했다. 윤희순은 그 선봉장에 섰다.

그는 들끓는 조국애와 일본에 대한 저항심을 종이 위에 먹으로 물들였다. 손수 지은 <안사람 의병가>에서는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라며 부녀자들의 항일구국의지를 북돋았다. 격문 <왜놈대장 보거라>에서는 “아무리 유순한 백성이라 한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알았단 말이냐 (…) 대장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며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05년 외교권이 피탈되고 1907년 정미7조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자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윤희순 의사는 춘천 가정리 여의내 골에서 놋쇠와 구리, 탄황 등을 모아 화약을 제조하는 탄약제조소를 직접 운영해 보급에 힘썼다. 강제합병 이후에는 만주로 망명해 노학당을 세워 약 50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정부는 1990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했다.

이처럼 조선 의병 중에는 무명으로 남은 춘천의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 의병의 활약은 한일강제합병 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정신적 근간이 됐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가부장제와 지도자 위주의 기록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여성이 잊힌 것은 사실”이라며 “우리 세대에 반드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위치를 찾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지령리만 잠잠할 수 있느냐?”

유관순 열사(1902~1920)가 조국광복에 대한 결의를 키워나간 곳은 다름 아닌 이화학당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김란사 스승 등 여성 개화에 앞장선 동문들과 함께했다. 강제합병 후 10년간 지속된 일제의 무단통치에 민족의 상처가 곪을 대로 곪은 기미년 3월1일, 이화학당에 있던 유 열사를 비롯한 동문들은 일제히 교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학생 안전을 우려한 프라이(Lulu E. Frey) 당장(堂長)에 의해 좌절됐다.

그럼에도 이화학당 학생들은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3월4일 저녁, 이화학당 기숙사에 ‘내일 오전8시 반 학생들이 남대문역(현 서울역)앞에 모여 만세를 부른다’는 말이 떠돌았다. 유관순 열사, 노예달, 신특실 등 이화학당 학생들은 동이 트자마자 새벽부터 남대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 날 학생 연합시위에 동참해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무사히 풀려났다.

잇따라 전국에서 태극기의 물결이 끊이지 않자 조선 총독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이에 유 열사는 고향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에 내려가 부친 유중권씨에게 “지령리만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며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4월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들의 태극기 행진이 천안 헌병대 앞으로 향했다. 비폭력 평화시위에 일제는 폭력으로 맞섰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행진 속에서 부친 유중권씨의 가슴에 탄알이 박혔다. 모친 이소제씨도 헌병의 칼에 찔려 숨을 거뒀다. 양친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유관순 열사는 도망쳐 나와야 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한 당신네들이 내게 무슨 죄를 줄 권리가 있단 말이오. 나는 잃어버린 내 조국을 다시 찾기 위해 투쟁한 당당한 애국소녀요."

헌병 경찰대에 붙잡힌 그는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내게 무슨 죄를 줄 권리가 있냐”며 재판장에게 소리쳤다. 이에 유 열사는 보안법 위반 혐의와 법정 모독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수원 기생 김향화, 이화학당의 박인덕 등 독립동지들이 있는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됐다.

성한 데가 없는 육체에 조국을 위한 정신만은 살아있었다. 그는 이웃 감방 수감자끼리 은밀히 소통하는 암호인 ‘통방’을 통해 3·1운동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1일에 만세를 외칠 것을 계획했다. 지난 해 전국을 가득 메웠던 함성소리를 재현하듯 여옥사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서대문형무소 전체로 퍼졌다.

옥중투사로 극심한 고문을 받고 방치된 유 열사는 1920년 9월28일 순국했다. 유 열사의 유해는 이화학당으로 옮겨졌다. 수의는 이화학당 동문들이 손수 지었다. 1962년 유 열사는 세 번째 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1일, 정부는 유 열사의 공적을 재평가해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했다.

 

△조국을 향한 마음에는 남녀도 신분도 없었으니

기미년 4월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 유관순 열사가 있었다면, 황해도 해주에는 기생 월희(김성일, 1898~1961)가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기생 노릇을 할 지 언정 우리도 이 나라 백성아닌가. 힘을 합해 독립운동의 투사가 되어보자.”

조선시대 말까지 관가에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던 기생들은 일제가 들어서면서부터 매음을 업으로 하는 ‘창기’와 동일시됐다. 「1910년대 ‘妓生’의 존재양상과 3·1운동」 (이동근, 2013)에 따르면 일제는 1908년 반포한 ‘기생 및 창기 단속령’을 통해 기생의 성병검사를 의무화하고 있는데, 이는 기생을 창기로 격하시킴을 의미했다.

이러한 일제의 모욕적인 대우와 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소식은 전국의 기생들을 궐기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1919년 2월 말 고종의 인산일을 앞두고 상경한 김성일은 기미 독립만세 대열을 만나고 깊은 울분을 느꼈다. 해주로 돌아온 그는 동료 기생 다섯 명과 함께 시내 종로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낭독할 독립선언서를 구할 길이 없어 직접 작성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그렸다.

4월1일 오후2시경 김성일을 비롯한 다섯 기생들이 해주군 종로일대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날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순식간에 3000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남문을 향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자, 일제 기마헌병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머리를 짓밟으며 탄압했다.

종로 일경에게 붙잡힌 다섯 기생은 경찰서에 이르자 돌을 집어 유리창을 부쉈다. 기마병이 주위를 둘러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만세를 제창했다. 종로 일경은 신분을 빌미로 그들을 조롱했다. “네까짓 기생들이 무슨 독립운동이냐, 부자 서방이나 얻어 호강하면 상팔자지!”

6개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 김성일은 1961년 중풍으로 별세했다. 2010년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약 90년 만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유교사회의 며느리, 이화학당의 학생과 교사 그리고 기생, 백정 출신에 이르기까지 조국 광복을 향한 움직임에는 남녀, 신분 구별이 없었다. 이런 일제 식민 통제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은 1919년 9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심 소장은 “그동안 여성독립운동가의 공적은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았다”며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몇 명만 데리고 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어 “무명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