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 독립운동가, 100년 전 등불을 켜다
이화의 독립운동가, 100년 전 등불을 켜다
  • 곽태은 기자, 허해인 기자
  • 승인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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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유진 기자 youuuuuz@ewhain.net
그래픽=이유진 기자 youuuuuz@ewhain.net

 

올해로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서울에서 시작해 제주, 해외까지 퍼져나갔던 만세 함성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총칼을 들고 싸우는 남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김구, 안창호, 윤봉길 같은 이름은 쉽게 떠오르는 반면, 여성의 이름은 유관순 열사를 제외하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는 여성 독립운동가 관련 기록과 홍보가 미미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국가보훈처에 등록돼 있는 인물 중 여성 독립운 동가는 약 2%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잊혔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라고 말 한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역사 속에 묻혀있던,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된 여성 독립운동가 2명을 소개한다.

 

△ “남녀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다. 여성도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독립을 부르짖는 1919년 3월 첫 날의 함성소리가 조선의 땅을 가득 메우기 전, 도쿄 조선 유학생 사이에 독립선언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2·8 거사를 앞둔 2월6일에는 동경 유학생들의 모임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여성 유학생 단체인 학흥회는 모임에 참석하라는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다. 이에 당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의 유학생이었던 평양 출신 황에스터(1892~1971)는 자리에 참석해 “독립을 갈망하는 마당에 남녀가 마음이 어찌 다르겠느냐”며 소외받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독립의 뜻을 이룰 수 있음을 외쳤다.

전통적 성 고정관념이 팽배했던 시기에 그는 부모가 정한 혼처를 거부할 정도로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에게 단식투쟁을 벌일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의도 넘쳤다. 이화학당 대학 예과인 중등과를 졸업한 그는 19살의 나이에 미국 장로교파 선교회에서 설립한 평양 숭의여학교의 교사가 됐다.

1913년 숭의여학교에서 그는 뜻이 통하는 여성들과 함께 ‘송죽비밀결사단’을 조직했다. 나라를 향한 변함없는 지조와 절개라는 의미다. 서로를 ‘송형제’로 불렀던 구국동지들은 가슴에 품은 태극기를 어루만지며 나라를 위해 기도했고, 각지에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에게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회비를 매달 거뒀다. 대부분 학생이었던 송형제들은 회비 낼 형편이 안되면 떡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송형제들은 평양뿐 아니라 지방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지방 교회마다 부인 계몽단체를 결성해 여성교육을 전개해나갔다.

이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2월8일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황에스터는 고국으로 귀환해 이화학당 대학과 제1회 졸업생인 신마실라를 파리강화회의의 조선여성대표로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신마실라의 파견 자금 마련을 위해 송죽회 동지들을 찾아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지는 시위행렬을 따랐다. 그러나 결국 일경에게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신마실라는 황에스터가 마련한 돈을 얼마 후에 전해 받고 회의 참석 기회를 얻고자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신마실라는 하와이로 건너가 운동 자금을 모으고 강연을 하는 등 독립 촉진 운동에 힘썼다.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지원한 것은 비단 이승만 박사뿐만이 아니었다.

황에스터는 대구 감옥에서 가석방된 후 1924년 이화학당 대학과 영문과를 졸업했다. 남북 전쟁 후에는 전쟁 고아와 여성을 위한 한미종합고등기술학교(현 경민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조국 재건을 위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1990년 정부는 그의 뜻을 받들어 건국훈장의 네 번째 등급인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처럼 여성들이 항일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등장한 근대식 학교의 여성교육을 통해서였다. ‘최초의 여학사, 하란사의 생애와 활동’(고혜령, 2011)에 따르면 개화기 당시 조선에 들어온 서양 사상과 근대적 제도들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동등한 인격체임을 인식하게 했다.

개화의 물결을 타고 1886년에 설립된 이화학당 또한 김란사(1872~1919) 등 여성 개화에 앞장선 ‘신여성’들을 통해 여성 교육이 이뤄졌다. 이화학당 대학과 제1회 졸업생 이화숙, 유관순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이화에서 조국과 대의를 위한 굳은 결심을 키워나갔다.

 

△ 유관순 열사의 스승이자 고종의 비밀특사, 김란사

“지금 내 속이 이렇게 캄캄합니다. 저에게 지식의 등불을 밝혀주십시오.”

당시 기혼 여성은 이화학당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란사는 이화학당의 프라이(Lulu E. Frey) 당장(堂長) 앞에 찾아가 손에 쥔 등불을 끄고 속이 캄캄하다며 입학을 간청했다.

인천항 통상 사무를 담당하던 하상기와 어린 나이에 혼인한 그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 귀부인이었다. 아쉬울 것 없는 그가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여성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청일전쟁의 소식을 듣고 난 후였다. 그는 동아시아의 중심인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한 것을 보고 민족 교육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그의 생각이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리게 했다. 그는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뒤 1906년 미국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 대학(Wesleyan University)에 들어가 문학사 학위를 땄다. 교육을 향한 일념 하나로 사비를 털어 유학길에 오른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다른 나라에 대한 관심은 갇힌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고민에서 비롯된다”며 “유학은 김란사, 황에스터 등 선각자 배출의 장이었다”고 말했다.

김란사의 주체적인 여성관은 한 선교잡지에서 벌인 윤치호와의 설전에서도 잘 드러난다. 윤치호가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 여학생들은 집안 살림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말한 것에 대해 김란사는 “학교의 목적은 요리나 바느질하는 법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김란사는 이화학당의 교사로 취임해 여성의 자각와 계몽 교육에 힘썼다. 이화학당의 기숙사 사감과 교감으로 지낼 때 그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통했다. 기숙사에 온 편지를 일일이 확인해서 남자에게 온 것이 있으면 건네주지 않고 품행점수를 깎아버릴 정도였다. 또 입학을 간청했을 때처럼 학생들에게 곧잘 “꺼진 등불에 불을 켜라”며 엄하게 소리치곤 했다.

그는 학생 단체 ‘이문회(以文會)’의 자치 활동을 지도하면서 주체적인 여성을 길렀다. 토론이나 창작과 같은 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의 정서와 생각을 주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유관순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재학할 당시 이문회에서 조국의 현실에 대해 고민하며 애국정신을 키워나갔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김란사는 고종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1919년에는 한일 의정서, 강제합병조약 등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원문을 들고 파리강화회의 비밀특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는 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소식으로 좌절됐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같은 해 3월에 국내외 실정을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리기 위해 북경으로 떠났다. 김란사는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하상기가 그의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땐 주검은 이미 까맣게 변해 있었다. 일본인 스파이에 의한 독살이 가장 유력한 사인이라고 전해진다.

김란사의 소식이 이화학당에 전해졌다. 그의 소식은 학생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심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1995년 김란사는 남편 하상기의 성을 따 ‘하란사’라는 이름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의 후손의 오랜 정정 요구 끝에 김란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서정현 교수(사학과)는 “역사는 늘 남성 지배자 중심으로 기록됐다”며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채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의 가부장제, 그리고 식민지 현실이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바람직한 국가와 사회를 만들고자 주체적으로 노력했던 여성들의 면모가 더욱 부각돼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 파리강화회의: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 미국 등의 승전국 대표들이 전후 처리를 위해 1919년 1월부터 개최한 회의다.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의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 청일전쟁: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이 1894년 제국주의 지배를 표방하며 청나라를 침략한 사건이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무너뜨린 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반(反)식민지의 길을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