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을 떠나는 심정이 어때?”

출국 전날, 친구가 물었다. 내 대답은 “몰라, 그냥 더워”였다. 열대야로 에어컨 없이 밤을 나는 게 불가능했던 날의 연속이었다. 그저 더운 한국을 탈출하겠다는 것이 목표였을 뿐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아침 10시에 눈이 떠졌다. 한 상 가득 한식이 차려져있었다. 김치찌개. 꽁치찜. 가지튀김. 넘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넘겼다. 목이 메어서 혹은 슬퍼서가 아니라 정말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그 외엔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다함께 1박2일 재방송을 보는 일요일 아침.

일상의 균열을 깬 건 동생의 한 마디였다. “누나 그럼 우린 내년에 보겠네. 잘 다녀와.” 문득 깨달았다.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 새해를 맞이하겠구나. 그 때서야 출국이 현실로 다가왔다. 많은 해외여행을 다녔지만 부모님이 공항까지 차를 태워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먼저 거절했거니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독립적으로 자식을 키우는 우리 엄마아빠를 누구보다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이번엔 용기내어 부탁했다. “아빠 내가 짐이 도합 50키로가 넘는데, 이번엔 태워주는 게 어때?” 부모님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고 했다. 아, 나도 공항에서의 슬픈 이별장면을 찍을 수 있겠군.

수속을 마치고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아빠는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지 눈앞에 보이는 잠바주스라도 먹을거냐 물었다. 어차피 짐 검사하면서 액체 빼앗길 거라 말하니 “아 맞다. 그러네.”하고는 풀죽어 돌아섰다. 정말 뭐라도 챙겨주고 팠던 마음인 걸 느꼈다. 집에서 떠날 때부터 비염이 도졌는지 코가 말썽이었다. 계속 코를 풀었는데 눈물이 눈에 맺혔다. 씩씩한 척 “아, 나 우는 거 아냐. 비염 때매 그런거야.”라며 말했지만 사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녀올게 하며 돌아섰는데 뒤돌아보니 출국할 때 들어가는 게이트까지 둘 다 따라오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말투로 엄마아빠 때문에 돌아오는 일 안 생기게 둘다 아프면 안된다 말하니 아파도 너한테 말안할거라고 계속 거기서 살라고 말했다. 마지막에 출국장에 들어서는 내 뒤로 들리던 엄마의 “걱정마”라는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출국장에 들어가서야 눈물이 터진 이유는 내가 엄마, 아빠한테 등을 보여서 였기 때문이다. 등돌려 걷는 그 장면이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함께 걷거나 내가 따라 걸어왔는데, 이번엔 나혼자 등돌려 그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이 내 코를 시큰하게 했다. 스물 셋 먹고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새삼스럽지만 모든 생활을 혼자 하는 홀로서기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나는 어렸다.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아빠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이별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다. 등을 보이며 눈맞춤을 그만두는 것이 이별일 뿐.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은 그것이 한정됨을 알면서도 잊게 된다. 내겐 그저 큰 도전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에겐 큰 이별이겠구나 깨달았다. 괜히 콧잔등이 매웠다. 이번은 슬퍼서가 분명했다. 이별과 함께 나의 교환생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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