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 성희롱을 당했다. 뉴스에서 자주 보도되며, 한 번쯤 들어봤던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 성희롱이었다. 그 채팅방에 속해 있던 5명 정도의 남학생들이 성폭력이라며 담임 선생님께 그 안에 있는 모든 내용을 전송했고 그때가 되어서야 그 채팅방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수치심보다는 화가 났다. 이런 희롱을 겪고, 그런 취급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로 난 명백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발언을 한 모든 남학생에게 전화했고 사과하라며 화를 내고 따지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 며칠뿐이었다. 이상하게 공론화시킬 수 없었다. 분명 난 피해자인데 주변 친구들에게 속 터놓고 말하기가 꺼려졌다.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변에 말했을 때, 혹시 그 속에서 또다시 내가 평가의 대상이 될까 두려웠던 것 같다.

급기야는 그 두려움이 내 생활 전체를 잡아먹어 담임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날 위로해주면서도 이건 성폭력과 학교 폭력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저 단순한 오해라면서 나를 데리고 그 열댓 명의 남자아이들을 마주하게 한 후, 오해를 풀게 했다. 대체 어떤 오해가 있었기에 그 아이들에게 난도질당해야 했었을까?

성희롱을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내 수능완성 책이 남학생들의 장난에 의해 젖게 된 적이 있다. 난 사과를 요구했고, 그 아이들은 그런 나의 태도가 예민하다는 이유만으로 날 조롱하고 희롱했다. 담임 선생님이 엄마와 나에게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단미가 좀 더 친절하게 사과를 요청했으면 좋았을 텐데. 원인을 제공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오해를 풀면 돼요.” 그 말을 듣고 잡고 있던 유일한 동아줄이 끊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나는 사과 받기를 포기했다. 오해라고 인정했고, 원인 제공도 먼저 했다고 생각하며 넘어가는 것이 맞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 이후 대학에 들어와 그때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알게 됐다.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피해자의 자격을 논하곤 한다. 그리고 사회가 지정한 피해자의 자격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질책을, 가해자에게는 명분을 만들어준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피해자의 옷차림, 행동거지, 주변 상황에 대해 가해자보다 더 예민하고 깊숙하게 파고들어

분석하고 비난의 화살을 올린다. 짧은 치마를 입지 마라, 노출이 있는 옷을 입어서 그렇지, 왜 여자애가 밤늦게 돌아다니니 이러한 말들을 다들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거다. 걱정과 우려로 포장한 이런 말들이 가해자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성폭력에는 피해자의 행실에 대한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피해자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를, 가해자에게는 탈출구로 향하는 열쇠를 쥐여줬던 것은 아닌지.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