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정치성을 모두 담아 ··· 역사 속 배제된 여성을 다시 보다
아름다움과 정치성을 모두 담아 ··· 역사 속 배제된 여성을 다시 보다
  • 박채원 기자
  • 승인 2018.11.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은영 작가
2018 올해의 작가상 수상
여성국극 소재로한 예술 작업
제공=본인
제공=본인

“예술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어요.”

스스로를 세이렌(Siren)이라 부르는 작가가 있다. 2018 올해의 작가상의 최종 수상자로 선정된 정은영(서양화과·97년졸) 작가다. 정은영 작가의 영문명은 ‘세이렌 은영 정’(siren eun young jung). 모두 소문자로 쓰여 있어 혹시 실수한 것은 아닌지, 이름이 맞기는 한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까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정 작가는 94년도 강렬했던 신진 페미니즘 흐름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그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 위험한 노래를 부르는 마녀같은 신화적 존재의 이름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가명으로 사용했던 세이렌을 지금은 작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올해 8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된 전시 ‘올해의 작가상 2018’은 구민자, 옥인 콜렉티브(김화용, 이정민, 진시우), 정은영, 정재호 등 현대미술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본 지는 4명의 작가 중에서 2018 올해의 작가상의 최종 수상자로 선정된 정은영 작가를 만났다.

정 작가는 ‘유예 극장’, ‘변칙 판타지’ 등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공연과 영상, 디지털화된 이미지의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여성국극은 여성배우들로만 공연된 창극으로 1950년대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말 사라져 버린, 전통극으로도 현대극으로도 자리잡지 못한 공연예술장르이다.

“여성국극을 소재로 삼게 된 것이 낯선 시작은 아니었어요. 2008년도에 여성국극 연구를 시작하기 전부터 성별 규범성에 질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진행해왔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새로운 언어를 작업에 담아내고자 했거든요.”

2009년 말부터 시작된 정 작가의 작업은 올해로 10년째 이어지는 중이다. 우연히 여성국극을 연구하는 선배를 따라 여성국극 공연자의 인터뷰를 따라가게 된 것이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됐다.

정 작가는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젠더의 ‘수행성’에 주목한다. 이 관점에서 배우들은 단지 연기만으로 ‘남자다운’ 남성이 되는 모습과 젠더의 모호한 경계를 통해 삶이 성별로 구별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보여줬다. 여성국극 배우들은 당연하게 생각되던 성별 인식론의 취약점을 삶 그 자체로 보여준 것이다.

잊혀져 간 여성국극 연구에 정 작가가 사용한 주된 자료는 구술인터뷰다. 그는 기술자료 보다는 구술자료에, 신문자료보다는 가십자료에 의존해 프로젝트를 만들어간다. 정 작가 작업의 첫 단계는 여성국극단으로 활동했던 할머니들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서사를 중심으로 대본을 다시 쓴다. 완성된 각본은 공연 후 영상으로 담겨 50~60년대의 공연 장면들, 인터뷰 당시의 목소리 등과 뒤섞여 편집돼 또 다른 작업으로 만들어진다. 여성국극 배우들의 나이가 있다보니 활동이 쉽지 않아 최근에는 작업 범위를 넓혀 젊은 배우와 작업 중이다.

이번 전시의 핵심을 묻자 그는 “그동안 진행해 왔던 프로젝트들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여성국극이 일종의 페미니스트 이론이나 퀴어 이론으로서 분석될 수 있는 쟁점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했다”고 답했다.

“여성국극의 모습은 탈 역사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어요. 보류된 아카이브, 틀린 인덱스라는 단어를 쓴 이유도 거기에 있죠. 애초에 여성국극이 하나의 역사로 쓰이지 못한 이유에는 여러 사회적 요인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배제됐기 때문이에요.”

예술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정 작가의 목표를 간단하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성별에 대한 인식론 해체이고, 다른 하나는 미학이 아름다움과 정치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정 작가는 견고한 성별 규범을 해체하기 위한 가정으로 젠더이론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성별의 수행성을 이야기한다. 성별이 생물학적으로 타고나거나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수행하고 연기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제가 예술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고 있는 분들이었던 거예요.”

여성국극 배우들은 극의 일부로, 또 삶의 전체로 젠더가 수행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배우들이 극 중의 연기만으로 남성이 되는 모습를 통해 젠더가 사회에서 왜 이렇게 강력하게 작용하고 차별을 만들어 내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예술가로서 ‘미학적인 것은 늘 아름답기만 하고 힘이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는 정 작가는 예술적 형식도 중요하지만 예술 형식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만들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작업을 한다.

그는 작업 안에 전하고자 하는 의도의 층위들을 다양하게 겹쳐 복잡하게 만든다. 작가 아카이브 인터뷰 당시 ‘사람들이 불편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그는 “사람들이 이미 자기가 견고하게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인식론들이 깨지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며 “아주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복잡하고 생각이 어려워지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가져온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목표하는 것들을 계속 이뤄내기 위해 아이디어들을 실험해보고자 한다”고 답했다. 상하이 비엔날레, 홍콩 바자르 아트페어, 베니스 비엔날레뿐 아니라 연 이은 일정을 앞둔 그는 “이렇게 바쁘다는 것 자체 감사하다”며 “이를 통해 좋은 실험들을 이어가고, 규범적 체계에 끊임없이 불순응하는 미학들을 만들어 낼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의 작가상을 받고 작업을 같이 했던 동료 작가에게 메일을 했어요. 저는 그냥 상을 탔다고 이야기를 한 것일 뿐이었는데 친구의 답장 말미에 it’s for all woman(모든 여성들은 위한 것이다) 이라고 보냈더라고요. 개인의 기쁨이 공적 기쁨이 되는 거 있잖아요.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나의 지반, 동료, 공동체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거 같아요. 이 모든 게 제가 90년대 신진 페미니스트를 통해서 배운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