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에서 찾은 과학·예술 융합의 길

지난 호 ‘미국 대학에서 찾은 과학·예술 융합의 길’ 첫 번째 기획으로 SAIC(The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SVA(School of Visual Arts), 매사추세츠공 과대(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을 방문해 과학과 예술이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융합됐는지 확인했다. 각 대학에서는 이미 강의실 안에서 다양한 융합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번 주는 미국 대학이 융합 교육을 실현한 구체적인 방법과 체제에 대해 알아본다.

 

△전공 구분 없이 자유로운 커리큘럼

미국 SAIC(The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와 SVA(School of Visual Arts). 이 두 예술학교는 커리큘럼 장벽이 거의 없다. 재학생은 자신이 듣고 싶은 수업을 전공 관계없이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다.

SVA 문정희 교수는 “SVA 내 많은 수업은 다른 전공생도 들을 수 있다”며 “디자인 전공 학생이 순수미술 수업을 듣기도 하고, 대학원생이 학부 수업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SAIC에는 학생의 전공 구분이 없다. 학과가 개설돼 있지만, 각 학과는 수업을 제공하는 역할일 뿐 학생이 소속돼 있지는 않다. 따라서 교양 과목 등을 제외하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커리큘럼도 없다. 재학생은 자신의 작업 방향에 맞는 수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평소 조소 작업을 하던 학생이라고 조소 수업만 듣는 게 아니다. 비디오 매체 수업, 바이오 아트 수업, 자신이 원하는 수업은 그 무엇이든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

학사학위에도 전공이 따로 표시되지 않는다. 건축학부 등 소수 전공을 제외한 SAIC 학부 재학생은 졸업 시 BFA(Bachelor of Fine Arts in Studios) 학사학위를 받는다. 조소 전공 학사학위, 패션 전공 학사학위로 구분되지 않고 모두 BFA라는 같은 학위 이름으로 졸업한다. 

전공 구분이 없는 이유에 대해 SAIC 차지연 실장은 “현대 예술 역시 영역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현대의 예술가라면 회화 작업을 하면서도 코딩이 필요하면 코딩을, 움직임이 필요하면 물리학을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예술이 경계가 없기 때문에 학교 역시 학생들이 예술과 과학을 가리지 않고 모두 익힐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영역을 넘나드는 현시대의 예술을 교육하기 위해 전공 구분이 없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융합형 수업 및 전공 개설

재학생이 특정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자유롭게 수업을 선택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 융합 수업 및 전공이 개설돼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다양한 선택의 폭을 제공하기 위해 매 학기 새로운 융합 수업 개설을 검토한다. 재학생에게 필요한 수업이라고 생각되면 이전에 없던 교육 형태일지라도 과감하게 개설한다.

ATS(Art and Technology Studies) 학과는 과학과 예술을 융합한 SAIC의 대표적인 전공이다. 올해 과학과 관련된 총 57개의 예술 수업을 개설했다. 네온 기술 수업(Neon Techniques), 전자 공학 예술 수업(Electronics as an Art Material), 과학 일러스트레이션(Scientific Illustration) 수업이 모두 ATS 전공 수업이다.

ATS 전공생은 시각 외 오감을 이용한 작업을 하기도 한다. 수업에서 과학을 예술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에 가능하다. 대표적인 수업이 후각 예술 수업(Olfactory Art)이다. 후각 예술 수업을 듣는 학생은 향기를 도구로 작업하는 방법을 배운다. 증류 추출 기술로 향을 뽑아내고 섞으며, 향기를 다양한 매체에 접목시켜 예술적 영감을 표현한다.

SVA 역시 다양한 수업이 개설돼 있다. 순수 미술 전공 소속의 학생들은 143종류의 강좌 중 원하는 수업을 자유롭게 선택해 들을 수 있다. 이 중 30개 이상이 과학적 기술이나 이론을 접목한 강좌다.

SVA 순수 미술 전공 강좌 중 과학·예술 융합을 구현하는 수업에는 바이오아트 코스가 있다. 바이오아트 코스에는 ‘해부학 I’, ‘해부학 II’, ‘음식 : 바이오 아트 프로젝트’ 등의 수업이 개설돼있다. ‘음식 : 바이오 아트 프로젝트’(FOOD: Projects in Bio Art) 수업에서 학생들은 수경 재배 식물과 지방 식품 DNA를 분석하고,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사진과 이미지를 구현한다.

MIT에는 학부생을 위한 디자인 전공이 개설돼 있다. MIT 디자인 전공은 공과대학인 MIT내에서 두 번째로 복수전공생이 많은 전공이다. MIT MIT 디자인 랩(Design lab) 임이현 연구소장은 MIT에 디자인 전공이 신설된 이유에 대해 “공과대학인 MIT 내에도 디자인 전공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디자인 및 예술과 관련된 다양한 수업을 개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풍부한 장비 및 시설 지원

대학에서의 융합 교육 시도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수업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관련 장비, 전문가, 실습실을 마련해야한다. 그 점에서 SAIC, SVA, MIT는 융합 수업을 위한 기반시설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총 4개의 건물로 이뤄진 SAIC에는 ATS 학과를 위한 실습실만 10개 종류가 마련돼 있다. 그 중 전자 공학 실습실(Electronics Lab)에는 새로운 하드웨어를 신속하게 개발할 수 있는 모든 도구와 전자 부품이 마련돼 있다. 일반적인 예술대학에서는 보기 힘든 시설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작업 활동에 사용할 부품들을 직접 만들 수 있다. 키네틱 아트의 경우 자신의 작품에 모터가 필요하다면 기성품을 구매해 사용하는 게 아닌 본인이 직접 자신만의 모터를 만드는 것이다.

SAIC 에두아르도 카츠(Eduardo Kac) 교수는 “이미 존재하는 소프트웨어나 기술 중에는 개개인의 작업에 꼭 맞는 것이 없는 경우도 있다”며 “예술가라면 자신이 사용할 기술이나 부품조차 만들 수 있어야하기에 제작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부품 요소와 기기들을 마련해놨다”고 설명한다.  

SVA 내에는 바이오 아트실에만 5종류, 10대의 고성능 현미경이 구비돼 있다. 학생들이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도록 내부에 다양한 생물을 키우고 있기도 하다. 수십 종류의 식물 외에도 가오리, 바퀴벌레, 생체발광 해파리, 홍어 등. 산호와 흰동가리, 팔레트 서전피쉬 등의 해수어를 기르기 위해서 바닷물 탱크를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작업 활동에 도움이 될법한 기술이나 학생들이 필요하다고 요청한 내용은 즉각적으로 검토돼 기반 시설이 만들어진다. SVA 순수미술과(Fine Art) 학과장 수잔 앵커(Suzanne Anker) 교수는 ‘VR 기술로 작업된 작품을 전시회에서 봤는데 배워보고 싶다’는 학생의 말에 다음 학기부터 바로 VR 수업을 개설하고 관련 장비를 구비했다.

MIT 내부에서는 전공을 가리지 않고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이나 프로젝트의 시제품을 만들어볼 수 있다. 사용할 수 있는 장비의 종류 및 수가 많기 때문이다. 10명에서 15명으로 구성된 MIT 내 디자인 랩(Design Lab)에만 종류별 5개 3D 프린터가 마련돼 있다.

MIT 디자인 랩(Design lab) 임이현 연구소장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학생들이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면 따로 외주를 맡기는 대신 내부에서 제작해본다”며 “공학적 아이디어든 예술적 아이디어든 시제품을 만들어보고 싶으면 학교에서 제공하는 오픈소스 프로그램을 통해 맞춤제작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수업시간에 가오리를 키우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SVA 바이오아트 랩(BIOART LAB)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수업시간에 가오리를 키우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SVA 바이오아트 랩(BIOART LAB)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과학과 예술 교류의 장, 레지던시 프로그램

과학자가 예술학교를 방문하고, 예술가가 공과대학을 방문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활성화돼 있다는 점 역시 세 학교 모두 비슷하다. 레지던시에 참가한 과학자 및 예술가는 개인 작업을 수행할 뿐 아니라 다른 영역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교육을 제공하기도 한다.

SVA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여름 방학 동안 진행된다. SVA는 프로그램 참가자는 디자이너 및 예술가로 한정돼 있다. 이들은 SVC 내 가장 ‘과학스러운’ 공간에 거주하면서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s)의 바이오 스튜디오 전경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s)의 바이오 스튜디오 전경
우아현 기자 wah97@ewhain.net

대표적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바이오 아트 여름 레지던시 프로그램’(Bio Art Summer Residency Program)이다. 프로그램 참가자는 SVA 내부 바이오 아트 연구소에 방문한다. 연구소에는 현미경, 식물 표본관, 수족관, 과학 도서관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순수미술과(Fine Art) 학과장 수잔 앵커(Suzanne Anker) 교수와 해양 생물 학자 조셉 데기오르기스(JosephDeGiorgis)등과 함께 바이오아트를 주제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MIT에도 예술가를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있다. 그중 하나가 MIT 예술 과학 기술 센터(Center for Art, Science & Technology, CAST)가 주관하는 예술가 방문 프로그램이다.  CAST 예술가 방문 프로그램은 과학자와 예술가가 협업해 예술 작품을 주제로 연구 개발할 수 있도록 진행된다. 참가 예술가는 최첨단 과학 시설을 경험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또한 참가 예술가는 공대 학생들에게 예술 관련 지도를 해준다.

SAIC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주기적으로 과학자를 초청한다. 올해 레지던시 프로그램에는 총 2명의 과학자가 선정됐다. 에나 에드 룬드(Anna Edlund)교수와 카산드라 프레셔(Cassandra Fraser)교수다. 꿀벌 꽃가루 전문가인 에나 교수는 가을학기에 ‘생명 창조 : 자연, 양육 및 발생학’(Creating Life: Nature, Nurture and Embryology)을 가르친다. 봄 학기에는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출신 화학자 카산드라 교수가 ‘인류세의 화학’(Chemistry of the Anthropocene)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한다.

SAIC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수학 강의를 진행했던 유진 챙(Eugenia Cheng)씨는 “예술학교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게 즐거웠다”며 “예술학교 학생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걸 보며 영감을 얻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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