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마을을 간직하다
그림으로 마을을 간직하다
  • 강지수 기자
  • 승인 2018.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호신 기증 특별전 ‘마을진경’, 12월31일까지 열려

“길을 떠나며 지내 온 지난 십여 년은 이 땅을 떠돌며 이웃의 삶과 자연의 향기, 그리고 문화유산의 숨결에 한껏 취했었다”

-이호신, 「길에서 쓴 그림일기」

사라져가는 마을을 그림으로 지켜온 화가가 있다. 이호신 작가는 전국 8도의 시골 마을을 순례하며 수묵담채로 자연과 사람을 담아온 화가다. 이 작가는 한국의 문화유산과 자연, 민족의 삶을 작품에 그려내 자연과 문화자원에 대한 전문성도 인정받았다. 실제로 그는 정부 기관에서 자연생태 우수마을 심의위원, 국립공원 경관 100선 심의위원 등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이호신 기증 특별전 ‘마을진경’ 9일부터 이화100주년기념박물관(박물관) 2층 기획전시관에서 진행 중이다. 이 작가는 1997년부터 실기 지도 및 특강을 하며 박물관과 인연을 이어와 2015년에는 작품, 화첩, 스케치북 등 269점을 이곳에 기증했다. 이번 특별전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0년부터 2011년까지의 작품 중 80점을 선별해 전시한다.

13일 박물관 2층 기획전시관 앞에서 전시의 제1큐레이터를 맡은 김주연 연구원을 만났다. 김 연구원은 “전국 곳곳의 마을을 순례하며 마을과 주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호신 작가 그림의 생명”이라며 전시 해설을 시작했다.

 

△숨김없고 세밀한 마을 전경

이호진, ‘누대의 터, 고창 상갑리 고인돌 마을에서’(1991)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이호진, ‘누대의 터, 고창 상갑리 고인돌 마을에서’(1991)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기획전시관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어두웠던 조명이 주황빛으로 밝아진다. 가장 먼저 보이는 이 작가의 작품은 ‘누대의 터, 고창 상갑리 고인돌 마을에서’(1991). 그림에선 ‘24-52’라는 숫자표가 붙은 바위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 지석묘다. 그중 하나에 노인이 걸터앉아 있다. 노인은 저 멀리 버스에서 내리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또 다른 작품 ‘양평 명달마을의 가을’(2002). 산비탈에 차곡차곡 쌓인 논과 그 뒤로 마을을 둘러싼 산, 논 한가운데 있는 이층집으로 걸어가는 허리 굽은 노부부 한 쌍. 논의 끝자락에는 무덤도 보인다. 이 작가는 무덤과 마을 사람의 모습을 생략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마을과 함께 살아간다. 작가는 마을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이호진, ‘경주 설창산 양동마을의 봄’(2006)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이호진, ‘경주 설창산 양동마을의 봄’(2006)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세 번째 방에 걸린 ‘경주 설창산 양동마을의 봄’(2006). 벽면 하나를 채우는 웅장한 크기가 시선을 압도한다. 수 십 채의 전통 기와집과 초가집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넓은 마당으로 둘러싸인 기와집 네 채가 중앙에 모여있고 그 주위를 웅장함 돌담이 에워싼다. 듬성듬성 지붕 노란 초가집도 보인다. 마을을 내려다볼 때 큰 나무와 큰 집에 가려 보이지 않을 법한 가옥도 모두 또렷이 보인다. 그림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이 작가가 일일이 문을 두드려 집을 둘러보고 화첩에 스케치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실제로 작가는 마을의 모든 집을 방문해 집의 구조를 모두 파악했다. 그 후 풍경 속에서 현장 스케치들을 재조합했다. 집 구조뿐 아니라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과 트럭까지 놓치지 않고 담았다. 

 

△이호신 그림의 생명, 마을 사람들

이 작가의 작품은 ‘사람들’이 중심이다. 마을 전경을 나타낸 그림들 역시 사람들의 모습이 빠지지 않으며 사람들의 얼굴이나 전신만을 그린 작품도 많다. 작품 ‘충주 단월 신대마을 사람들’(2005)에서는 마을 사람들 9명의 이름과 정보가 표기돼 있다. 가게주인 66세 조복행, 신대마을 부녀회장 54세 김정순. 사람들의 표정이 각기 다르다. 4세 박희수 어린이는 뚱한 표정. 75세 강원구 노인은 쭈그리고 앉아 근심 어린 표정. 70세 임선규 노인회장은 어색한 듯 웃음 짓고 있다.

이호진, ‘봉화 닭실마을 대종부 류한규 여사’(2005)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이호진, ‘봉화 닭실마을 대종부 류한규 여사’(2005)
김미지 기자 unknown0423@ewhain.net

‘봉화 닭실마을 대종부 류한규 여사’(2005)그림에는 기둥에 손 한쪽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다. 평생 집안일을 해온 류 여사다. 이 작가는 류 여사가 거칠고 투박한 손을 숨기려 하자 기둥에 손을 올린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해 그림에 옮겼다고 한다. 하얀 저고리에 청록빛이 도는 한복 치마를 차려입은 노인은 이마와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있다. 이 작가에게 주름진 얼굴은 한 생애의 표정이자 삶의 역사다. 이들의 삶을 증언하는 그림을 그리고 기록하는 것을 작가는 가장 가치 있게 여긴다. ‘77세, 중풍으로 고생함, 슬하에는 7남매.’ 이 작가가 들고다니며 스케치한 화첩 속 메모다. 이 작가는 마을을 순례하며 직접 기거하고 숙식하며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화첩에는 인물 스케치와 함께 인물의 나이, 가정사가 모두 기록돼있다.

 

△옛 고구려의 정취를 느끼다

그에게는 사람뿐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녀산성의 밤’(1999)은 과거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 겨레의 삶을 회상한 작품이다. 밤하늘을 수놓은 영롱한 별빛과 공허한 산등성이. 별빛 아래에서 우리의 옛 땅은 집 한 채 없이 공허하기만 하다. 이미 사라진 옛 마을에 방문해 우리 겨레의 역사를 기리는 작가의 감성이 느껴진다. 그는 저서 「그리운 이웃은 마을에 산다」에서 “한 겨레가 살아온 땅의 자취 속에는 문물의 역사와 인문정신, 그리고 자연의 숨결이 공존하며 삶의 현장을 이뤄 오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1998년 중국에 있는 옛 고구려 영토를 방문해 오녀 산성의 모습을 작품으로 빚었다 .현재 존재하는 마을이 아닌, 역사 속 마을을 그리는 것은 마을의 노인을 기록하는 것과 같다.

이날 전시에는 조은정 강사(예술학전공)가 함께 전시를 관람했다. 조 강사는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이자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하며 해당 전시 도록에 평론 ‘이호신의 화첩; 기억과 환기의 트리거’를 기고했다. 조 강사는 “이 작가의 작품에는 겸재 정선의 진경의 정서가 드러나면서도 표현방식은 민초의 삶 속에서 민중의 삶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평론에서 “이호신은 우리 시대 드물게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풀과 나무와 사람을 만나고 마을을 그려온 작가”라며 “그는 작품에서 마을이 마을인 이유는 사람이 그곳에 있기 때문임을 일러준다”고 했다.

전시를 관람한 이예은(예술학 전공 석사과정)씨는 “시골의 모습을 무조건적으로 이상화하지 않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사실적으로 표현돼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이번 ‘마을진경’ 전시는 2층 기획전시관에서 12월31일까지 이어진다. 박물관의 개관 시간은 오전9시30분~오후5시며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