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를 복수전공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꼭 받게 되는 질문은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익숙한 인상주의 작가들, 이를테면 모네(Claude Monet)나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의 이름을 대곤 했다.

어제 또 이 질문을 받았다. 그 순간,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던 그림들과 이름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인상파 최초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다. 베르트는 자연 속에서 소풍을 즐기는 모습이나 아이를 돌보는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찰나들을 화폭에 담았다. 그녀의 그림은 특유의 잔잔한 분위기와 따듯한 색감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든다.

베르트는 파리에서 8번 개최됐던 인상주의 展에 7번 출품했을 정도로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불참했던 한 번의 전시도 출산이 사유였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전시에 출품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화가들이 인상주의에서 눈을 돌렸을 때도 베르트는 끝까지 인상주의를 지켰다.

비평가에게서는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이 당시 받았던 혹평들과는 대조적으로 늘 호평을 받았다. 그녀만의 예술적 미감과 당시 유행하는 테크닉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점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현재 영국 런던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를 포함해 전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그렇다면 왜 모두들 베르트를 모를까? 모네나 르누아르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 익숙하게 느끼지만 베르트와는 초면인 이유가 뭘까? 서글프지만 그 이유는, 베르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인상파의 홍일점이었던 베르트가 출산 이후에도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유명한 로코코 화가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의 증손녀였기 때문이다. 부유한 예술가 집안에서 자란 베르트도 여성을 가르치는 미술 학교가 없어 오랜 시간 방황했고, 루브르 박물관(Le musee du Louvre)에서 습작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마네(Edouard Manet)에게 기술을 전수받아 겨우 정식으로 회화에 입문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여성주의 사조가 어엿한 미술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했고,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여러 여성 작가들이 발굴돼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베르트의 이름을 읽을 때마다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 힘들다.

나는 어떤 작가를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단번에 베르트의 이름을 이야기할 것을 다짐했다. 그게 누구냐고 되묻는다면 베르트의 이야기를 하며 “네가 아는 화가들이 다 남자인 게 이상하지 않았어?” 물을 것이다. 그러고선 내가 지금 이름을 대지 못하는, 하지만 존재했을 수많은 여성 작가들의 팬이라고 말하겠다. 이름 없이 사라지거나, 그림을 향한 열정을 품은 채 시도도 해보지 못한 작가들, 혹은 남편의 이름으로 출품됐을 그녀들의 그림에 열정에 환호와 애정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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