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갈증의 계절이었다. 유난히 더웠고, 다른 의미로 뜨거웠다. 페미니즘을 다루는 책들이 수십 권씩 출판됐으며 연이은 성폭력 고발로 언론이 떠들썩했다. 불법촬영을 규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뙤약볕에도 혜화역을 가득 채웠다. 몇 년 사이 평등을 외치는 소리는 더 커졌지만, 그 소리가 닿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찬물을 들이켜도 가슴이 답답했다.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내 목구멍을 막고 있었다.

내가 성차별 문제에 관해 목소리를 내는 곳은 주로 이화였다. 수업시간에 토론할 때, 혹은 동기들과 이야기 나눌 때. 이화를 벗어나면 내 입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불편한 내색을 하면 분위기를 망칠까봐,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나서는 게 될까봐. 차별을 마주한 상황에서도 여러 이유를 대며 갈등을 피해왔다. 앎과 실천이 다른 것처럼, 페미니즘과 내 일상에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는듯했다. 답답함은 열대야만큼이나 나를 잠 못 들게 만들었다. 말할 곳이 필요했고, 함께 고민해줄 사람이 절실했다.

그때쯤 내 일상에 변화가 찾아왔다. 동네에 작은 큐레이팅 서점이 생겼다. 때로는 낯선 곳에서 더 용기가 난다고, 모임을 안내하는 벽보와 책장 한편의 여성학 도서를 보자마자 “페미니즘 독서 모임도 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이화 밖에서, 그것도 16년을 살아온 동네에서 나는 처음으로 페미니즘 모임을 열었다.

혼자 읽으려고 사뒀던 책을 꺼내들고, 일정표와 홍보물도 직접 만들었다. 조그만 동네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한두 명이라도 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모집했는데 7명이 넘게 신청했다. 같은 지역에 산다는 공통점을 빼면, 직업도 전공도 성격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진행자라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갖고 시작한 모임은 페미니즘을 나의 일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매주 책을 읽고 모여 성 평등에 관한 고민을 나누다보니 마음가짐부터 달라졌다. 일상에서 갈등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는데, 오히려 부딪히며 얻는 게 더 많았다. 어디서도 편히 말하지 못했던 차별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으며 나의 견해도 정리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맞서라는 말이 옳았나보다. 묵혀둔 생각과 감정을 내놓을 때마다 시원한 물 한 컵을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탈코르셋부터 백래시까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페미니즘 담론은 혼자 고민하기에 버거울 수 있다. 함께 말하고, 귀 기울이고, 부딪힐 기회를 놓치지 말자. 매일 뜨겁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땀을 빼듯 이야기를 쏟아낼 시간이 필요하다. 무더위가 끝나도 서점은 여전히 시끌벅적하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동네 서점으로 향하는 동안 새삼 느꼈다. 갈증의 계절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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