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 역사를 걸어온 세 사람을 만나다
이화의 역사를 걸어온 세 사람을 만나다
  • 권소정 기자, 이수연 기자
  • 승인 2018.1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할머니, 딸, 손녀 모두 벗...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 기부해

방숙자(가사·42년졸) 할머니와 그의 딸인 최청규(영문·65년졸)씨, 외손녀 곽상희(영문·92년졸)씨는 지난 19일 본교에 3000만원을 기부했다. 다가오는 23일 방씨의 100세 생일을 맞아 기부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올해로 무려 한 세기동안 이화와 연을 이어온 ‘3대 이화가족’이다. 이 장학금은 현우문화재단에서 현우3代장학금으로 학생들에게 수여하게 된다.

3대에 걸친 이화와의 추억은 무엇이 있을까. 각 세대의 학창시절을 들어보기 위해 3일 최청규씨 댁을 방문했다.

 

3일 오후2시 최청규씨 자택에서 만난 최씨, 방숙자씨, 곽상희씨(왼쪽부터) 최도연 기자 contagious-grin@ewhain.net
3일 오후2시 최청규씨 자택에서 만난 최씨, 방숙자씨, 곽상희씨(왼쪽부터) 최도연 기자 contagious-grin@ewhain.net

△ 1대 이화인, 100세 방숙자 동문

졸업 당시의 방숙자씨 제공=본인
졸업 당시의 방숙자씨 제공=본인

집에 들어가자 부엌에서 방씨가 지팡이 없이 거실로 걸어나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많았어요”라며 반겼다. 등이 곧아서일까 그가 걸친 연분홍빛 셔츠가 어깨에 반듯하게 맞아 떨어졌다. 이화에 대한 추억을 물으러 왔다고 하자, 편하게 앉아있던 소파에서 허리를 떼고 기자 쪽으로 몸을 숙이며 질문을 재촉했다.

방씨와 이화의 연은 그의 오빠가 이어줬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그의 오빠는 이화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이화에 입학하는 것도 오빠의 추천이었다. 손녀인 곽씨가 “(할머니의) 오빠가 이화에 가라 그러셨어요?”하고 묻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긍정했다.

이화여대는 40년대에 ‘이화여자전문학교’라고 불렸다. 부잣집 여성이 아니면 대학은 고사하고 소학교도 가기 힘든 시대였다. 당시 부모님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학과는 가사과, 약학과, 영문과였다. 딸인 최씨는 “가사과는 시집을 잘 가라고, 약학과는 돈을 잘 벌라고 보낸다는 말들도 있었죠. 영문과는 꿈을 먹는 사람들이 간다고 하기도 했죠”라며 당시 학과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1937년 12월 22일 촬영한 방숙자씨의 단체 졸업 사진 제공=본인
1937년 12월 22일 촬영한 방숙자씨의 단체 사진 제공=본인

대학에 입학한 방씨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교에서 먹고 잤다. 그 때문일까 그가 첫 번째로 떠올린 이화의 건물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기숙사다. 기부를 위해 본교를 방문했을 때 방씨는 이제는 식당인 예전 기숙사 건물 진선미관을 보자 반가워하기도 했다.

반가워한 만큼 그곳에서의 추억도 많다. 남북이 나뉘어있지 않던 시기라 남쪽인 충청도에서 온 방씨뿐 아니라 북쪽인 평안도에서 온 학생까지 전국 팔도에서 학생들이 모였다. 팔도에서 온 부잣집 딸들이 모여 있으니 부모님들이 때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들을 자주 보내주셨고 학생들은 그때마다 그 음식들을 한데 모아놓고 나눠 먹었다. 이외에도 매년 다 함께 김장도 했다. 방씨는 “기숙사가 가장 기억에 남지 먹고 놀았으니까”라며 “가사실습소에서 다 같이 김장을 했어”라고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방씨는 선교사에게 가사 수업을 들었다. 그는 “모리스 선생이란 사람이 있었지 수업은 보자... 한글말로 했어”라고 정확한 선생의 이름을 떠올리기도 했다. 당시 선교사는 영어로 수업을 했지만 조교가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로 번역해줬다. 그러나 방씨가 재학 중인 일제강점기 말 선교사 선생들은 일본의 명령으로 수업을 그만둬야 했다. 그는 “서양 선생들 다 쫓겨나고 했을 때지. 그때 우린 정이 들어서 울고불고하고…”라며 약 80년이 지난 지금도 아쉬워했다. 선교사들이 떠난 자리는 한국인 선생들이 메꿨다. 방씨는 “미국 사람들이 다 쫓겨나고 활란 선생이 총장을 하고 그 다음에는 옥길이가 총장을 했지”라며 즐거워했다.  방씨는 김옥길 전 총장보다 더 나이가 많아 ‘옥길이’라고 불렀다.

가정과에서 방씨는 주로 요리를 배웠다. 그러나 방씨는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딸이 “가사에서 뭘 가르쳐줬어? 한국요리? 아니면 서양요리?”라고 묻자 “그건 잘 기억이 안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씨처럼 다른 동창들도 정정하게 살아계실까 궁금해 지금의 교우 관계는 어떤지 물었다. 그는 같은 반이었던 부산대 윤학자 명예교수를 떠올렸다. 지금까지도 계속 연락을 하는 윤 교수 외 다른 동문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에 딸인 최씨는 “90대까지는 동창들과 어머니가 잘 만났었다”고 덧붙였다.

 

졸업촬영을 하고 있는 방숙자씨(왼쪽에서 열 번째) 제공=본인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방숙자씨(왼쪽에서 열 번째) 제공=본인

△ 2대 이화인, 76세 최청규 동문

딸인 최씨는 졸업 후에도 20년 이상을 이화에서 보냈다. 그는 대학원까지 이화에서 졸업한 후 미국으로 잠깐 유학을 갔다 돌아왔다. 그후 20년 가까이 이화에서 교양영어 강사로 일했다. 이후에도 영어 학회라는 이름의 영문학과 동창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화에 올 때마다 친정집 같은 정다운 마음이 든다고 전했다.

최씨는 대학교 다니던 시절도 생생하다. 등교하는 길 옆으로 나란히 세워진 다방, 빵집들. 지금은 화장품 가게들이 많이 들어서 거의 남아있지 않은 예전 풍경 속에는 그의 남편이 즐겨 찾았던 ‘그린하우스’라는 빵집도 있었다. 학생들이 당시 등굣길에 입었던 옷차림까지 어제처럼 선하다. 최씨는 “우리는 하이힐을 신고 다녔는데 그때 유행이 대학을 들어가면 운동화 같은 건 안 신는 거야”라며 “힐을 신고 스타킹으로 무장을 하고 걸어오는데 대강당 계단을 오르기가 얼마나 힘들던지”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외에도 정문 주변 기찻길, 교내에 있었던 수위실 등을 떠올리며 풍경이 많이 바뀐 것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영문과인 최씨는 학관에서 대부분의 수업을 들었다. 당시 학관 건물은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신식 건물이었다. 최씨가 학교를 다닐 당시인 61년부터 65년 사이에는 수세식 화장실을 가진 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학관의 모든 화장실이 수세식인 것을 보며 신식 건물이라고 느꼈지”라며 “그리고 휠체어도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어있어 당시 최고의 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지금 가면 너무나 초라해”라고 말했다. 반면 손녀인 곽씨는 학관을 ‘춥고 어두운 건물’로만 생각한다. 곽씨는 “학관 뒷문으로 많이 다녔는데 춥고 어두웠다”며 “아는 집 딸이 논술 시험을 학관에서 쳤는데 그렇게 춥고 힘들었다더라”하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학교에 다닐 때 최씨는 이화보이스(Ewha Voice), 영어연극 동아리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그가 이화보이스 기자로 활동했을 당시 신문 헤드라인을 뽑는 재미가 있었다고 했다. “당시 크레인이라는 담당 선생님이 계셨는데, 수술받으러 미국에 가셨다 회복하지 못해 돌아오지 못했다”며 슬픈 기억도 떠올리곤 했다.

오랫동안 학교와 함께한 최씨는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남달랐다. 그는 “대학 갈 때, 특히 여학생들은 서울대 아니면 이화여대였어”라고 말했다. 이어 그의 딸이 대학교에 지원했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담임이 그의 딸에게 서울대에 지원하라고 거의 강요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에 지원할 때 딸 아이가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는데 서울대 지원을 안하면 그 아래(학생)는 서울대를 쓸 수 없어서 그랬어”라며 “가족들도 이화대학에 보내려고 해서 거의 선생님이랑 싸움이 날 뻔했지”라고 했다.

당시에는 보통 입학 동기들과 함께 졸업했다. 최씨는 4년을 함께 지낸 동기들과의 끈끈함을 이화를 향한 애정의 원인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그는 “결혼을 하기 전에는 일하며 경쟁도 했지만 결혼 후에는 다 그냥 동기야”라며 농담으로 ‘이화마피아’라는 단어를 소개했다. 이화마피아는 이화 출신의 남편들이 전부 요직에 있다는 말을 희화화한 단어로 ‘이화가 하려는 일 중에 못 할 일은 없다’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 3대 이화인, 50세 곽상희 동문

손녀인 곽씨의 입학은 가족잔치였다. 10명이 넘는 사촌들, 할머니인 방씨를 비롯한 가족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가 입학할 때는 학교 운동장에 이름을 붙여 합격자를 발표했다. 최씨는 “그냥 합격이 아니라 진선미 장학금을 타서 신이 났다"며 "어머니를 모시고 온 식구들이 운동장에 모여 딸애 이름 앞에서 사진 수백 장을 찍었다”고 말했다.

곽씨가 이화에서 겪었던 가장 억울한 순간은 채플에 간발의 차로 지각했을 때다. 그는 최씨에게 “엄마 때도 채플 출석체크를 했었냐”며 “정문부터 그 언덕을 달려가서 대강당 문에 섰는데 1분 늦었다고 안에서 이미 잠가놨더라 너무 분했었다”고 토로했다. 곽씨가 할머니인 방씨에게도 채플을 물었지만 방씨는 “잊어먹었지 뭐”하다가 문뜩 자신이 채플에서 불렀던 노래 중 가장 좋아했다는 찬송가 222절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의 한 소절을 선보였다.

영문과를 졸업한 곽씨는 외국계 기업인 IBM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가 이 기업에 들어간 이유는 졸업 직전 참여한 취업박람회 때문이었다. 당시 졸업생들이 취업하려면 학교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입사 원서 봉투’를 받았어야 했다. 봉투 속에는 종이 원서가 들어있었다. 곽씨는 “제가 취업하려 할 때는 호황기여서 취업 걱정은 없었어요”라며 “좋은 직업 환경 때문에 IBM이 가고 싶은 기업 1순위였죠”라고 말했다.

 지금 아들만 둘이라는 곽씨는 “4대 이화 가정이라는 짐을 지지 않은 게 가장 큰 기쁨”이라며 “지금은 그냥 이대로 즐겁게 살려고 한다”며 현재에 만족해했다.

이화의 역사를 걸어온 세 모녀는 미래를 걸어갈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선물하며 “처음 선교사들을 통해 여자대학이 시작해 지금까지 온 것은 감사한 일”이라며 “장학금이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