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도 오늘
한 걸음 더···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 그 이름을 ‘돈 키호테’라 하자. 현실을 밟고 올라선 늙은 로시단테를 타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를 믿어주는 산초와 함께, 거대한 풍차로 상징되는 이 세상을 향해 돌격하며, 돈 키호테는 외쳤다.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을 따자!”라고. ‘돈 키호테’라 쓰고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유쾌한 자’, ‘불가능성을 꿈꾸는 자’, ‘세상 모든 <바깥>을 향해 돌진하는 자’라고 읽기로 하자.

  나는, 나 혹은 네가 생각하는 나보다, 나 혹은 네가 말하는 나보다, 그리하여 세상이 아는 나보다 더 큰 내가 내 안에 있음을 노래한 적이 있다.

  네가 생각하는 나보다 나는 더 크지

  나무말구유에 나서 나무십자가에 매달렸던 그리스도는 나무를 다스리는 대대로의 목수셨지 저잣거리에서 자르고 밀고 깎고 파다 못 박히셨어 봄마다 두 팔 벌려 거듭 피는 나무들이 부활의 베이스캠프야 구원의 웜홀이야

  나야말로 누가 아는 그 누구도 아냐

  포정이라는 백정은 단칼로 소의 멱을 잡고 획획 쐐쐐 뼈 마디마디 살 사이사이를 켰다지 거듭의 칼날이 활의 날처럼 음악소리를 낼 때까지 (……)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는가

정끝별, 「일파 만파 답파」 일부

  꿈을 꾼다는 건, 내 안의 심연 위로 훌쩍 튀어 오르는 첫 걸음이다. 꿈을 향해 나아간다는 건, 하루에 하루를 더해 내 안의 심연을 일깨우고 다시 그 심연에 자장가 불러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일매일 ~을 한다는 것’이다. 하여 ‘지금’의 나는, ‘이미’의 나를 넘어, ‘아직’의 나로 진화를 거듭하는, 과정중의 나이다.

  스무 살 청춘이 아프거나 힘든 것은 미래의 막막한 불안과 불확실 때문이다. 막막하고 불확실한데도 가야하고, 몰려서 가기도 하고 몰라서 가기도 한다. “끝내 안 보일 때까지 본 일 또 보고/ 끝을 볼 때까지 한 일 또 하고//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몰리니까 한 걸음 더”(정끝별, 「한 걸음 더」)!

  선 자리에서 한 걸음 내딛는 곳이 바로 앞이고 나아가는 곳이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우리는 어딘가에 가 닿을 수 있고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만 걸음이 되고, 만 걸음 만 걸음이 모여서 미래를 돌파해내는 것이니, 힘들겠지만 오늘도 한 걸음 더! 돈 키호테가 온몸으로 외치고 있지 않은가. 진정한 용기란 겁쟁이와 무모함의 중간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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