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처럼 퍼지는 불법 촬영, 찍지 않는 것 이상의 예방은 없어

얼마 전 친구와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었다. 분주히 제 갈 길을 가는 인파 속 계단을 내려가는데, 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그곳에는 “몰래카메라 촬영, 신고가 예방입니다.”라는 문구가 굵은 글자로 인쇄돼 있었다. 특별한 문구도 아니고 딱히 눈에 띌 이유도 없는 포스터였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 위에 덧 쓰인 글자였다. 누군가 포스터 위에 유성 매직으로 가위표를 치고 문구를 고쳐놓은 것이었다. “몰래카메라 촬영, ‘찍지 않는 것이’ 예방입니다.”

그야말로 ‘몰카 공화국’이다. 불법 촬영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나, 해를 거듭할수록 걷잡을 수 없는 정도는 우리 일상을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로 곤두서게 한다. 지하철역, 공중화장실, 기숙사, 심지어는 쇼핑몰이나 공연장 같이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도사리고 있는 불법 촬영의 위험 속에서 그동안은 항상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잘 둘러보자, 짧은 옷을 입지 말자, 가릴 것을 챙겨 다니자... 그리고 여차하면 신고하자.

그러나 그날 지하철역에서 본 포스터의 대담한 가위표는 나에게 ‘네가 조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맞다. 불법 촬영 범죄는 피해자가 생각이 없어서, 더 조심하지 않아서, 옷차림이 단정치 못해서,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몰래 찍기 때문에, 유포하고, 소비하고, 그것에 침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범죄다.

경찰청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적발된 불법 촬영 범죄 건수만 해도 6465건에 달한다. 전년 대비 24.7% 증가했다. 하루 평균 17.7건꼴이지만 적발되지 않은 수까지 생각하면 그 규모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올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등학교와 초등학교, 심지어는 잇따른 공무원 몰카 사건 등 웬만한 불법 촬영 범죄 기사는 이제 뉴스도 아닐 지경이다. 날마다 현대판 판옵티콘 안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정작 처벌은 너무도 가볍다. 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마저 침해하는 범죄임에도 10건 중 9건이 벌금형, 집행유예, 선고유예로 풀려나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신고가 예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미 벌어진 일을 신고하는 것은 본질적인 예방이 아니다. 강력 단속으로 불법 촬영의 뿌리를 뽑아 신고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진정한 예방이다. 적발되면 솜방망이 조치 대신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예방이다. 팔지 않는 것, 사지 않는 것, 찍지 않는 것, 보지 않는 것이 예방이다. 뉴욕타임스에 한국의 몰카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고 보도된 것이 부끄럽다면, 진정한 의미의 예방이 무엇인지 재고해보아야 한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최소한의 인권이 보호되는 사회를 원한다. 더이상 몰카가 걱정돼 외출해선 화장실을 잘 가지 않는다는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 싶다. 애꿎은 나사구멍을 의심의 눈초리로 빤히 바라보며 불안해하지 않고 싶다. 어쩌다 가게 된 공중화장실에서 누군가 실리콘이나 휴지조각으로 막아 놓은 벽의 구멍을 보고 서글픈 동질감을 느끼지 않고 싶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