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부터 프랑스어를 전공한 내 목표는 ‘프랑스인이 되기’였다. 내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프랑스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남들이 나를 그 나라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환학생으로 7개월간 살며 느낀 프랑스는 결코 천국은 아니었다. 느린 행정처리와 잦은 파업, 노상방뇨 등 프랑스인들의 무책임한 태도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종차별이었다. 내가 동양인의 ‘생김새’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야유했다. 거리에서 쏟아지는 위협적인 욕설 때문에 억지로 귀가해야만 했다. 혼자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성인 남성들로부터 병에 얼굴을 맞은 적도 있다. 목격한 수십 명이 모두 철저히 방관을 택했다는 사실은 프랑스에 인종차별이 얼마나 공기처럼 만연한 것인지 보여줬다. 난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이방인이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통 교환학생들은 교환학생들끼리 친해져 무리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난 그것을 모르고 프랑스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 원어 강의만을 수강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강의들에서 교환학생들은 극소수였고, 나 홀로 외국인인 경우도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말을 걸어 친해지고,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아무리 프랑스어로 편히 소통할지라도, 살아온 삶의 방식과 유머코드가 다른 소위 ‘깍두기’가 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난 절대 프랑스인이 될 수 없었다.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아싸’였던 내가 ‘인싸’처럼 놀 수 있게 된 것은 같은 이방인 처지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부터였다. 내가 살던 리옹(Lyon)에서는 언어교환 행사가 매주 열렸다. 모로코, 튀니지 등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온 친구들이 특히 많았고, 그 외에 베트남, 이탈리아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다. 서로가 다름을 전제로 하는 덕분에 누구 하나가 중심이 되고, 주변이 될 일도 없었다. 그 세계에서는 다름이 개개인의 특별한 매력으로 빛을 발했다.

같은 ‘아싸’ 친구들과 함께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프랑스인들 사이에 껴서 억지로 프랑스인이 되려할 필요도, 한국인으로 살아온 나의 지나온 인생을 미워할 필요도 없었다.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외국어는 결코 목적이 아닌 행복해지기 위한 소통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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