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바쁘다. 기존에 세워져 있는 기준에 부합하려고 바삐 움직이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 때 상처를 받는다. 우리는 죽을 만큼 노력해서 평범해지려 하고, 자신이 보편·타당한 사람임을 증명하려 애쓴다.

‘객관성. <철학> 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대상 자체에 속하여 있는 성질.’ 객관성의 사전적 정의다. 우리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객관성을 찾아 울부짖는다. 누군가가 무엇에 내린 판단에 대해 이것이 과연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판단인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그렇게 수없이 의심해서 얻어진 객관적인 산물을 우리는 믿었건만, 미국의 소설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며 그 산물을 또다시 부정한다.

손택은 대표적인 배신의 산물로 사진을 제시한다. 사진은 우리 삶 속에서 어떤 상황을 증명하는 증거로 많이 사용될 만큼 객관적인 기준으로 적용되며 우리가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우리는 철저하게 주관적인 사진작가가 의도한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비단 사진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람의 손, 눈에 의해 만들어지며, 이는 곧 우리 주변에 객관성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득 그토록 찾아 헤매던 객관성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 과연 필요하냐는 회의감이 든다. 사회는 우리들의 모임이다. 우리에게는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있고, 그 언어 속에 많은 것들이 오간다. 한 사람이 말하는 언어 속 명제에 타인을 설득시킬 수 있는 논거와 공감요소가 있다면. 굳이 객관성이 필요할까? 예를 들어 월드비전에서 후원 홍보차제시하는 사진이 후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관적인 사람이 의도한 것이어도, 그 의도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의도라면? 객관성이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에 모든 것을 일관되게 참과 거짓으로 나누고, 그 절대적인 기준이 틀렸음이 증명돼도 움직이지 않는 그런 위험한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이 개입돼 참과 거짓이 확실하진 않아도 모두의 토론으로 거짓을 참으로 바꿀 수 있다면?

사람들이 수 천 년 동안 생각하고 논해온 객관성에 대해 이 짧고 조그만 글로 완강히 부정하는 것이 위험하고, 내 생각이 짧은 것일 수 있다는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객관적이지 않으면 어떤가. 객관성의 객관성을, 그 객관성의 객관성을 끊임없이 따지며 발생하는 모든 오류를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을 위해 무시하는 것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개입된 우리 모두의 주관성을 나는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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